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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간선에서, 또 다시
W.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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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님, 우리 헤어져요."

햇빛이 따사로운 날, 분위기가 좋은 카페 창가에서 동식은 아무런 예고 없이 지훈과의 이별을 고했다. 

"왜, 왜 그러는데...? 어.....?"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커진 지훈의 눈동자는 금새 눈물이 터져 나올 것처럼 보였다. 그런 지훈의 말에 동식은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지훈은 동식이 자신의 배를 찌르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동식의 짧은 신음 소리와 톡, 하고 바닥에 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지훈의 머릿속을 빠르고 단단하게 옭아맸다. 피에 젖은 동식의 손을 본 순간, 지훈은 시간이 잠시 멈췄다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것만 같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동식이 자신을 꼬옥 붙들고서 숨을 크게 내뱉는 순간이 아주 느리게 느껴졌고 자신에게 닿는 동식의 손길 또한 느리게 다가왔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상황 파악을 하려던 그 때, 죽은 척 하라는 동식의 목소리가 방아쇠라도 되는 듯이 시간이 멈췄다.

 

그래, 죽기 싫으면 죽은 척이라도 해야지. 

지훈은 동식의 말대로 픽, 하고 쓰러져 죽은 척을 했다.



 

살고 싶으면 죽어야지, 죽어.

자신에게 되내이고 되내인 나머지 지훈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상무님, 아니 서지훈씨. 좋아해요. 저랑 사귀실래요?"

동식의 고백은 아주 뜬금없이, 그것도 회사 로비에서 대표가 된 서지훈을 붙잡으며 시작됐다.

지훈은 고백이라는 것에 놀람도 잠시, 그 곳이 회사 로비, 그것도 시간은 모든 직원이 출근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동식을 맨 위층 자기 사무실로 이끌었다.

"야, 미쳤어?? 그렇게 사람 많은데서, 아잇."

"상무님이 좋아요.... 상무님은 제가 싫으세요?"

지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망설였다. 지훈이 동식과 눈을 마주친 순간, 자신을 희생해 가며 서지훈이라는 사람을 지키려 했다는 것을 떠올려버렸기 때문이다. 

 

서인우처럼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고, 성격도 뭐 같은 나를 희생까지 해가면서 지키다니.

......멍청이.



 

**



 

무거운 침묵 속에서 지훈이 입을 열었다.

"뭔데... 왜 그러는데, 나한테.... 내가 너무 제멋대로 굴어서 그래? 그래서 나한테 질린 거야? 어?"

이번에도 동식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훈의 잔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그냥, 그냥이요. 그렇게 알아주세요."

동식은 그냥이라는 대답과는 달리 많이 슬퍼보였고,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야위어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지훈을 죽이면 붙잡힌 보경을 풀어주고, 동식의 도주까지 도와준다던 인우의 말에 동식은 살짝 솔깃했었다. 아니, 동식은 정말로 지훈을 죽일 생각이었다. 

 

서인우만 입 닥치고 있으면 아무도 내가 죽였는지 모를 텐데, 괜찮지 않을까? 

만약 서인우가 배신하고 날 경찰에 신고한다면 그땐, 서인우도 죽여 버리면 돼.

 

옆에 있던 나이프를 빼 지훈의 코앞까지 다가갔을 때까지 동식은 진짜 저지를 생각이었다. 

 

 

'어차피 나쁜 놈이잖아, 너.'

 

한 발, 한 발 지훈에게 다가가며 비명소리만이 귓가에 들려올 때 쯤, 동식에게 인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널 무시하고 괴롭히던 놈들, 죽이고 싶어 했지 않나? 어서 죽여 버려."

 

그제야 동식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인우의 말에 넘어가 살인을 저지르려다가 또 다시 인우에 의해 정신을 차렸다. 너 따위가 할 말은 아니지,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너보다야 서지훈이 훨씬 나은 사람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짧은 찰나 어떻게 이 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지훈은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울부짖으며 '살려줘', '이 새끼야' 등을 반복했다.

'살려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끝까지 알 수 없는 놈.'

하지만 동식은 지훈을 이상한 놈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눈앞에 있는 지훈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항상 휘둘리고 이용당해왔던 자신, 자기의 의지 따위는 전혀 들어있지 않은 상황들이, 서지훈의 모습에서 자신과 닮았다고 무의식적으로 느낀 것이었다.

동식은 자신과 닮은 지훈에게 강한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사랑이라고 착각할 정도의 강한 감정을 말이다.



 

*



 

"거짓말하지 마, 육동식. 그냥이라면서 넘어갈 생각인 거 누가 모를 것 같아?"

동식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훈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야, 나 대한증권 상무야. 너 죽을 때까지, 평생 잘 해줄 수 있다고.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봐. 응?"

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동식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지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동식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영원함을 갈망했다.

영원한 사랑을 갈망했다.

끊임없이 나를 애정해주는 사람을 원했다.

끝없는 사랑을 바라는 내게 지쳐버린 사람들처럼 떠나버리는 게 아니라, 애정만 있다면 뭐든 하는 나를 이용하다 버리는 게 아닌,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만을 갈구했다. 

상무님이 이런 저를 받아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결국 지쳐서 절 떠나실 거예요.

아무도 저와 함께 있으려 하지 않겠죠.

결국 저는 영원히 혼자고,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거예요.

아무도 이런 절 사랑해주지 않았어요. 이용할 뿐이죠.

아무리 상무님이시더라도 전 감당하지 못하실 거예요. 

전 항상 이 모양이니까요.






 

"영원한 건 없어요. 상무님."



 

**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서지훈을 죽여."

나는 그 목소리가 두려웠다.


 

앞으로 벌어질 불확실한 일들이 우리에게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그 끝이 불행일지, 행복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



 

**



 

하늘에서 하얀 눈이 살포시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육동식, 오늘 먹고 싶은 거 뭐 없어?"

지훈이 자신의 손에 호호 입김을 불어가며 말했다.

"에이~ 오늘은 서지훈 씨가 대표된 날이잖아요. 대표님 드시고 싶은 거 먹어요."

대답하는 동식의 뺨과 코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도 말해 봐. 이 서지훈 대표가, 육동식이라는 사람한테 아주 멋진 걸 선물하고 싶은 거니까."

"음, 그러면......"

"어, 뭔데. 말해 봐."

"스타티스의 꽃말이 뭔지 아세요?"

"뭐야, 그게."

"영원한 사랑이래요."

 

영원한 사랑, 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지훈의 눈동자가 커짐과 동시에 양 볼과 귀는 새빨갛게 물들었다.

"너, 너, 너, 너, 너어!! 그거 프러포즈냐!!!???"

“그런가요?”

“너어....”










 

또 다른 시간선에서, 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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