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년화 악령, 저주
W. 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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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고 힘들 때마다 회사 건물 옥상으로 향하는 건 동식에게 있어서 몇 년 동안 이어진 습관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밀려 있던 욕을 한 번에 듣는 것 마냥 팀장에게 와장창 깨진 동식은 도저히 업무가 손에 잡히지 않아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덤덤한 표정이었으나 옥상에 다다라 난간 대에 기댄 동식은 모든 물체와 사람들이 작게 보이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평정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칭찬 한마디 없이 갈굼만 당하는 회사생활에 서러움이 물 밀 듯 밀려왔다. 시야는 곧 뿌옇게 흐려졌고 얼마 되지 않아 눈물이 뚝 하고 가마득한 아래로 떨어졌다. 바보 같이 울긴 왜 운담. 눈물이 다시 한 방울 떨어지자 동식은 소매로 눈가를 세게 문질렀다.
"죽을 거면 그냥 지금 뛰어 내려, 어차피 죽는 건 한 순간이니까."
갑자기 들려 온 목소리에 동식은 화들짝 놀라 소리가 들린 옆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돌린 곳에는 말끔한 정장 차림의 단정해 보이는 남자가 뒷짐을 지고 서서 웃고 있었다. 분명 옥상엔 자신뿐이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사람일까.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서 기분 나쁜 말을 하는 남자를 동식은 약간의 불쾌함과 의아함이 서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왜요, 남겨질 사람들이 걱정 되요? 죽음의 장점이 뭔 줄 알아요?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 없다는 거."
남자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동식의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죽어요, 여기서 떨어지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을 거야."
갑작스레 나타나 죽으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동식은 제 넥타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남자의 손을 밀어냈다. 그의 손은 마치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새까만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밀어 낸 동식의 손을 물끄러미 보다 천천히 동식의 눈을 마주했다. 순간 동식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 그는 괴이한 눈빛이 부각되어 매우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저 아세요?...초면인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되죠. 물론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요."
웬만한 일에는 적당히 넘어가는 성격이지만 동식은 상대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여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남자는 동식의 말을 듣고도 농담이었다 말하거나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 약간 웃음기 띤 눈으로 동식을 흥미롭게 보았다. 그 시선에 왜인지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 죽어?"
"...네?"
"신기하네, 너는 왜 안 죽지?"
어딘지 핀트가 나간 것 같은 남자에 동식은 더 말을 섞으면 저도 이상해질 것 같아 옥상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는 것 같더니 천천히 동식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따라오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동식은 왜인지 소름이 돋아 문턱을 넘자마자 뒤 돌아서서 문을 닫았다. 충동적인 행동이었어서 동식은 잠시 멈칫 했으나 그 남자가 문을 열고 다시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머뭇거리던 동식은 재빨리 계단을 후다닥 내려갔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며 소름이 돋는 팔을 문질렀다. 어디 부서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다.
..
동식의 바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그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자와 이번에는 화장실에서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볼 일을 보고 있는데 세면대 쪽에 서서 미소 띤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그에 동식은 너무 놀라 뜀박질 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가만히 서있는 걸 보니 볼 일 보러 들어온 것 같지는 않고 혹시 저를 찾아온 건가 싶어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식은 당황한 걸 최대한 티내지 않고 남자를 지나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초면에 죽으라고 했던 것도 이상하고, 계속 이상하게 쳐다보는데 혹시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인가 싶어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손을 다 씻을 때 쯤 슬쩍 고개를 들어 거울로 뒤를 보니 그는 동식을 보고 있었고 거울로 눈이 마주친 동식은 파드득 놀라 서둘러 화장실을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남자는 동식을 붙잡거나 하는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하아...뭐야 저 사람..."
잔뜩 찌푸린 얼굴로 어쩐지 서늘한 몸을 주물거리며 사무실로 돌아온 동식은 의자에 걸려 있던 가디건을 걸쳐 입었다.
"동식씨 감기야?"
"아뇨, 그냥 좀 추운 것 같아서요."
"응? 오늘 난방 꽤 빵빵한 거 같은데. 혹시 모르니까 집 가면 약 먹어요."
주임의 말에 동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의사표시를 했다. 이상한 사람을 만나서 잔뜩 긴장했더니 그런가 보다 하고 손바닥으로 양 뺨을 짝짝 가볍게 친 동식은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이날 그 남자와 또 마주치는 일을 없었다.
집에 가서 조언대로 감기약 잘 챙겨먹고 잠까지 잘 잔 동식은 날이 밝은 뒤 최상의 컨디션으로 출근을 했다. 전날 욕먹었던 일도 어떻게 잘 풀렸고 잠을 잘 자서 그런지 개운한 몸에 단순하게도 얼굴엔 웃음이 서렸다. 꽤 괜찮은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늦게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까진 말이다.
동식은 다른 직원들보다 일을 조금 늦게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하러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탔는데 문득 시선이 익숙해 보이는 구둣발로 향했다. 오싹하니 뒷머리가 비죽 서는 것 같은 느낌이든 동식은 고개를 번쩍 들어 구두의 주인을 올려보았다. 앞만 보고 서 있던 남자는 동식이 질겁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느리게 눈동자를 움직여 동식을 보았다.
동식은 이미 닫힌 문에 식은땀을 삐질 거리며 문 쪽으로 보고 섰다. 몇 년 동안 이곳에서 일 하며 본 적 없었던 사람을 이틀 동안 세 번이나 마주치다니, 그것도 혼자 있을 때만. 우연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너무 이상했다. 혹시 나를 몰래 따라다니나? 왜? 동식이 부들거리며 빨리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길 바라고 있는데 그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엘리베이터는 쇳소리와 함께 멈추어 섰다.
층 버튼과 열림 버튼을 눌러 보고 비상 버튼도 눌러보았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동식은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는 사실보다 수상한 사람과 단 둘이 있다는 게 더 무서워 벌벌 떨었다. 가만히 뒤에 서 있던 남자는 버튼을 연신 누르며 왜 안 열리지 하고 혼잣말을 하고 있던 동식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동식이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서다 쾅 소리 나게 엘리베이터 문에 등을 부딪쳤다.
"내 이름, 서인우에요. 이름이 뭐에요?"
"....육, 육동식이요"
"아, 동식씨. 우리 첫 만남이 좀 안 좋았죠?"
좀이 아니라 많이 이상했는데... 동식은 차마 머릿속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입을 우물거렸다. 인우는 동식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고 거리가 좁혀지자 동식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해요, 내가 그 때 실언을 했어요."
"네?"
부드럽게 전해져 오는 말에 해코지를 당할까 잔뜩 굳었던 몸이 조금 풀렸고 동식은 감았던 눈을 떠 인우를 올려보았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꼭 꾸며낸 것만 같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어딘지 불편했다.
"괜, 괜찮아요. 다음부턴 누구한테든 그런 말 하지 말아주세요. 좀...많이 이상하거든요."
동식의 말에 인우는 별 대답 없이 씨익 웃어보였다. 역시 이상해.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걸 느낀 동식은 폰을 꺼내 직장동료에게 도움요청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런데 연락을 하려 하자마다 덜컹 하더니 엘리베이터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1층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급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동식은 망설이다가 뒤를 돌아보고는 인우에게 살짝 목례했다. 그리고 재빨리 그 곳에서 벗어나려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동식의 뒷모습을 웃음기 지운 얼굴로 바라보던 인우는 문이 닫힐 때까지 꼼짝하지 않았다.
...
"저...왜 자꾸 따라다니세요?"
며칠 내내 하루에 두세 번씩은 꼭 마주치는 인우에 동식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참고 참던 말을 입 밖으로 뱉어냈다.
"스토커에요?"
처음엔 자꾸 마주치는 인우가 무서웠는데 여러 번 마주치는 게 당연하게 하루 일과가 되어버린 후에는 무서운 감정이 사그라들고 귀찮다는 감정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혼자 있을 때 뿐 아니라 이젠 사무실까지 따라 들어 온 그를 보고 동식은 질색하며 팔을 잡아 끌었다. 인우는 그 행동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실실 웃었고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웃어요? 빨리 나가라니까요, 사무실까지 따라오면 어떡해요."
동식이 한참 낑낑거리는데 같은 팀 대리가 책상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서류를 흔들었다.
"동식씨, 거기서 혼자 뭐해? 빨리 와서 이거나 검토해봐."
대리의 말에 인우를 잡아끄는 행동을 멈춘 동식은 의아한 표정으로 인우와 대리를 번갈아보았다. 혼자? 옆에 이렇게 존재감 넘치는 사람이 있는데 왜 혼자라고 하지? 부티 나는 정장 차림에 키도 크고 전체적인 외모가 이 정도면 눈에 띄는 편인데 그런 인우를 없는 사람 취급 하는 대리가 이상했다.
"저...여기, 이 사람이 남의 사무실에 막 들어 와가지고..."
"누구 말하는 거야?"
대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었고 동식은 휘둥그레 해진 눈으로 인우를 보았다. 그리고는 막 제 앞을 지나는 동료직원을 잡아 세웠다.
"여기, 여기 이 사람 안 보여요?"
동식이 삿대질 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직원은 이내 웃으면서 저를 잡은 동식의 손을 떼어냈다.
"안치던 장난을 다 하고, 근데 너무 뻔해요. 하나도 안 무섭다."
말을 마친 동료직원이 탕비실쪽으로 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문득 자신이 아직 인우의 팔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달은 동식은 덜덜 떨며 조심스럽게 손을 떨어뜨렸다. 첫 만남부터 분위기까지 기묘했던 인우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며 동식은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어떡하지, 나 귀신 붙었나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얼어붙어 있는데 인우가 동식의 팔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이따 또 봐요."
몸을 훑는 것만 같은 냉기가 스쳐지나간 후에 주변 공기는 금세 다시 따뜻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동식은 결국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인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저 귀신인지 뭔지 하는 존재가 자신을 왜 따라다니는지. 인우가 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자각한 날 동식은 집에서 많은 단어와 문장을 검색했다.
<귀신> <유령> <한 사람한테만 보이는 귀신>
<저승사자> <저승사자 외모> <지박령>
<정장 입은 귀신> <귀신이 따라다녀요> <굿>
<엑소시스트> <귀신 쫓는 법>
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결과를 찾지는 못했다. 어떤 검색 결과에서는 죽을 때가 됐다느니 하는 괜히 사람 속을 더 뒤집어 놓는 글도 있었다. 검색을 하면 할수록 심란함이 가중되기만 할 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 말을 하잖아? 말 하니까 대화를 해보면 되지. 왜 따라다니는지 물어보자. 동식은 신빙성 없는 인터넷 잡글 보다 차라리 매일 보는 인우에게 질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
"왜 안 죽는지 궁금해서요. "
괜히 물어봤다 싶을 정도로 인우의 답변은 소름 끼치기만 했다.
"그게...왜 궁금해요?"
"보통은, 내가 죽으라고 하면 죽거든. 근데 동식씨는 안 그러니까 뭐가 특별 한가해서."
동식은 늦은 밤에 일을 미뤄주고 간 직원들 때문에 강제 야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우가 어김없이 나타나 주위를 기웃 거리기에 고민하다 질문을 한 거였는데 돌아온 답변이 역시나 으스스해서 끄응 하고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전날 집에서 검색해본 글 중에 악령, 악귀, 원한귀 등에 대한 서술이 떠올라 안 그래도 긴장으로 뻣뻣한 몸이 꼭 기름칠을 해야 할 것처럼 끼걱이는 느낌이 들었다. 동식은 더 이상 아무 말도 걸 수 없었고 차가워진 손으로 애써 인우를 의식하지 않으려 자판을 두드릴 뿐이었다.
그런데 인우가 손가락으로 동식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끝을 만져왔다. 동식은 신경 쓰지 않으려 했으나 뒷골까지 스미는 냉기에 고개를 움직여 피했다. 하지만 인우의 손은 끈질기게 따라왔다.
"하지 마세요, 저 일 마무리해야 되요."
"마무리하면 갈 거잖아요."
"저도 집에 돌아가야죠."
"나는 돌아갈 곳이 없는데, 동식씨나 따라갈까?"
인우의 말에 동식은 거의 울먹거리는 모양새로 손을 파들거렸다. 인우는 그런 동식의 모습에 낮게 웃었다.
"회사에서는 이제 도망가지 않는 것 같더니 집까지 따라가는 건 무서운가봐요."
"..."
"일, 도와줄까요?"
"네?"
인우는 동식의 책상에 있는 서류의 일부를 가져가 옆자리에 앉았다. 동식은 컴퓨터를 켜며 서류를 뒤적이는 인우를 보고 정말 살아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고 물건에 손도 댈 수 있는데... 지나치게 차갑거나 갑자기 사라지는 것만 빼면 산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능숙하게 일 처리를 하는 것을 넘어 깔끔하게 서류를 분류하는 걸 보곤 동식은 인우가 궁금해졌다.
"인우씨는...여기 직원이었어요?"
"아주 옛날에요. 이 건물이 대한증권 건물이었을 때. 그땐 이사였어요. 서인우 이사."
"이, 이사..."
지금 나 이사님한테 일시키고 있는 거야? 동식은 머쓱해져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어쩌다가...."
"죽었냐고? 일종의 권력다툼이었어요. 배다른 동생하고 회사를 사이에 두고요. 근데 난 아버지 손에 죽었어, 여우같은 늙은이... 근데 내가 이 모습으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났고 우습게도 그 둘은 죽고 없더라고."
"그래서 사람들한테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화풀이로...?"
동식의 말에 인우는 마지막 서류를 정리해 동식에게 넘겨주며 씨익 웃었다.
"아니, 그냥 재밌잖아요. 발버둥 치며 살아 온 걸 한순간에 끝내는 게. 아, 워드로 정리한 문서는 메일로 보내뒀으니 확인 해봐요."
뭔가 굉장한 사연은 듣나 싶었는데 기승전싸이코 같은 이야기로 마무리 되는 말에 동식은 서류를 받아들고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 정도 이성은 있는 존재라는 확신이 들어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인우가 공포영화에서처럼 마주치기만 했는데도 죽어라 쫓아와 어떻게든 죽이고 마는 그런 막장 느낌의 끔찍한 귀신이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론 자신을 어떻게 할 작정으로 찾아오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당장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
다른 부서에 전달 할 물건이 있어 엘리베이터에 오른 동식은 당연하다는 듯 먼저 타고 있는 인우를 보고 생긋 웃었다. 이제는 없으면 허전할 정도였다. 인우가 웃는 동식을 보고 가볍게 미소 짓자 동식이 장난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서이사님, 안녕하세요."
"응, 동식씨."
언제부턴가 인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된 동식은 자신이 마치 어린왕자 책 속의 여우가 된 기분이 들었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라고 말했던 여우처럼 동식은 아침에 일어난 순간부터 회사에서 인우와의 만남을 설레어했다.
무언가 잘못 된 건 아닐까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나누었던 대화들을 조합해 본다면 인우는 죄의식 없이 그저 재미로 사람을 죽여 온 인성이 파탄 난 귀신인데 제게 다정하게 구는 모습이 왜 그렇게 좋은 건지. 아직도 속을 알 수가 없는데,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데도 그에게 끌렸다. 홀려버린 걸까? 오싹하게만 느껴졌던 그 까만 눈이 이제는 제게 향하길 동식은 바라고 있었다.
"꼭 사내 비밀 연애 하는 것 같아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층을 누른 동식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곧 아차 싶어 제 입을 막았다.
"아, 그게, 우리 둘만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다른 사람들은 모르잖아요. 그래서...기, 기분 나쁘셨으면 사과드릴게요. 죄송해요."
동식은 당황해서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인우는 동식을 잠시 물끄러미 보더니 입을 열었다.
"난 좋은데, 동식씨랑 하는 사내 비밀 연애."
그 말에 동식은 얼굴은 물론이고 목과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인우가 묘한 표정으로 동식에게 다가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동식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아무일이 일어나지 않자 실눈을 떴다. 인우는 가만히 동식을 훑어보고 있었다.
"동식씨, 살 빠졌어요?"
"네? 아...요새 입맛이 좀 없어서 안 먹긴 했는데..."
동식의 대답에 뭔가 생각하는 듯하던 인우는 동식의 콧등에 입을 가볍게 맞추고 물러섰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동식은 다시 활활 타는 얼굴이 되서는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입술이 닿았던 콧등을 손으로 감싸고 황급히 내렸다. 냅다 도망치는 동식의 귀에 뒤에서 잘 챙겨 먹으라는 인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타부서에 물건을 전달해준 동식은 화장실에 들렀다. 인우와의 접촉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좋기도 해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타부서에 뭐라고 하며 물건을 전해줬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찬물에 세수라도 해야 정신이 들 것 같았다.
"와, 나 미쳤나봐."
후끈거리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나서 한숨 돌린 동식은 거울을 보았다. 인우가 꺼냈던 말처럼 살이 빠지긴 한 건지 목둘레가 헐렁해진 옷을 추스르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더니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 턱을 타고 세면대로 뚝뚝 떨어졌다. 새하얀 세면대가 붉은 선혈로 얼룩지자 깜짝 놀란 동식은 급한 대로 옆에 휴지를 뽑아 코를 막았다.
몸 상태가 안 좋은가? 동식은 요즘 들어 부쩍 피로감을 많이 느끼기도 하던 터라 조만간 병원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큰소리 나는 일 없이 조용한 나날을 보내나 했으나 그건 불어 닥칠 폭풍 전의 고요였다. 출근 하자마자 동식은 팀장실로 불려갔다. 팀장실에는 팀장 뿐 아니라 대리도 같이 있었는데 사무실 안 공기는 숨 막히도록 무거웠다.
"야 육동식! 이거, 이거 너가 마지막으로 검토 했다며?"
팀장은 서류철 하나를 동식의 발치로 집어 던졌다. 머뭇거리다 서류철을 주워 든 동식은 서류를 살펴보았다. 며칠 전 대리가 검토를 부탁했던 내용이었다. 그 때 분명 잘못된 부분과 재확인이 필요한 부분을 체크해서 넘겼었는데 수정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동식은 떨리는 시선으로 대리를 보았다. 대리는 동식의 눈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너 때문에 중요한 계약이 파토 나게 생겼다고! 이게 한두 푼 하는 계약인 줄 알아? 너가 여기서 10년이고 20년이고 일 해도 손에 못 쥘 금액이야!"
버럭 화를 내며 팀장이 난리를 쳐도 대리는 동식을 곁눈질하며 전혀 도와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동식은 깨달았다 모든 잘못을 자기에게 덮어씌우려 하는구나 하고. 제 일을 동식에게 맡기고 수정조차 하지 않은 대리나 올라 온 보고서를 제대로 확인 하지 않고 상부에 올린 팀장이나 다 똑같이 저열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머지않아 잘려나갈 보잘 것 없는 꼬리였다.
"너가 잘못했으니까 다 책임지고 나가! 어리버리한 새끼, 이런 것도 부하직원이라고..."
팀장이 동식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리고 서류철을 빼앗아 머리를 치려고 할 때 갑자기 책상 위의 스탠드가 떨어져 박살이 났다. 깨진 파편은 사방으로 튀었다. 파편이 푹 고개를 숙이고 있던 동식의 시야에 들어오자 동식은 스탠드가 올려져 있었던 책상을 보았다. 그곳에는 인우가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걸터앉아 있었다. 사무실 안의 형광등도 깜박이기 시작했다. 팀장과 대리를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보고 있는 인우에게선 마치 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동식은 인우와 눈이 마주치자 살살 고개를 저었다.
"뭐야 갑자기...이따 얘기하고 관리실에 연락이나 해 봐."
팀장은 깨진 스탠드와 깜박이는 형광등을 잔뜩 찌푸린 얼굴로 보다가 대리와 동식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무거운 발걸음을 뗀 동식은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느낌이 들었다. 검진 갔을 땐 아무 문제없다고 했는데 스트레스 때문인가? 동식이 사무실 문고리를 잡자마자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지는가 싶더니 눈앞이 암전이었다.
동식이 눈을 떴을 때는 주변이 온통 밝은 응급실이었다. 지끈 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일어나니 옆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사무실 막내 직원이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셨어요?"
"아, 네..."
"회사에서 갑자기 쓰러지셔서...일단 가족 분들한테 연락드리긴 했는데 바쁘셔서 크게 다친 거 아니면 못 오신다고 그러셨..는데."
"괜찮아요."
"그리고 팀장님이 오늘은 쉬고 내일 다시 얘기 하시자고..."
"네...시간이 늦었네요. 고마워요, 이만 가보세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거의 하루 종일 누워있었던 건지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확인하곤 동식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막내 직원은 웃으며 아니라고 손사래 치더니 혼자 갈 수 있겠냐고 다시 한 번 물어보고 동식이 고개를 끄덕이자 꾸벅 허리를 접어 인사 하고는 자리를 떴다.
동식은 흘렸던 코피로 붉게 물든 제 흰 셔츠의 앞면을 만지작거렸다. 병원에 오자마다 상태 체크를 받았다고 하는데 의사의 말에 의하면 큰 문제는 없고 과로인 것 같다고 했다. 아, 인우씨 놀랐겠다. 사무실에 같이 있었던 인우를 떠올리곤 동식은 걱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일 잘리면 앞으로 인우씨는 어떻게 본담. 동식은 옷을 추스르고 신발을 신었다.
바람이 한 번 세게 불면 풀썩 쓰러질 것 같은 몸 상태로 어두운 골목을 비척비척 걸어 집으로 향했다. 정상적이지 않게 오래 잠들어 있었어서 그런지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 건지 자꾸만 힘이 풀리려는 다리에 동식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문득 아버지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허구한 날 빌빌 거리고 사람 좋은 척 하니 당하고 사는 거라던 말이. 그래도 누군가는 잘 살고 있다, 고생했다라고 해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믿어오던 가치관이 발아래 엉망으로 짓이겨진 것만 같았다. 내가 잘못 살아온 건가?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달 한점 보이지 않은 캄캄한 하늘이 꼭 제 인생처럼 느껴졌다.
자취방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아무도 없을 불 꺼진 방이 생각나 기분이 더 암울해졌다. 혼자 있으면 잡생각이 많아진다. 들어가자마자 일단 아무 생각 말고 씻고 영화나 한 편 보자고 생각하는데 가로등 아래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동식의 집은 어떻게 알았는지 회사에서만 봐왔던 인우가 가만히 서서 동식을 보고 있었다. 환한 가로등 불빛 아래였으나 그림자는 지지 않았고 그 빛은 인우를 비춘다기 보단 인우에게 빨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인...우씨?"
동식이 긴가민가해서 이름을 부르니 인우가 느린 걸음으로 동식에게 다가왔다.
"놀랐어요?"
"..."
주춤하고 동식이 물러나니 인우는 걸음을 멈추고 동식을 지그시 보았다.
"내가 다시 무서워졌어요?"
여기까지 온 인우가 전혀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무서운 감정보다는 다른 감정들이 조금 더 앞섰다. 반가움, 설레임, 서러움, 어리광부리고 싶은 마음까지 복잡하게 뒤섞였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읽힌 것 같아 당황해서 뒷걸음질 쳤던 동식은 떨리는 숨을 내쉬며 인우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여긴...어떻게 왔어요?"
"보고 싶어서요."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이 교차했다. 의문을 해소시켜 줄만한 답변은 아니었으나 그 답변으로도 동식은 충분함을 느꼈다.
"그럼 여기까지 왔으니까, 오늘...나랑 같이 있어줘요."
동식은 조심스럽게 인우의 품에 기대었다. 인우는 대답 없이 동식의 복슬 거리는 갈색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동식은 하루의 고단함이 모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
인우는 이른 오전부터 회사 건물 옥상에 자리했다. 사색에 잠겨 있는 인우의 표정은 어둡게 그늘져 있었다. 사색의 대상은 동식이었다.
처음엔 그저 호기심이었다. 제 말이 통하지 않는 동식에 대한 호기심.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물리적으로도 죽일 수는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까 궁금함이 컸다. 솔직히 오래 관찰을 했어도 무엇이 특별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다만 동식이 제게 호감을 표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모든 게 바뀌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사람에게 붙어 죽으라고 속삭이는 것만이 기나긴 방황의 세월동안 유일한 즐거움이었는데 언젠가부턴 동식과 대화하는 것이 더 즐거워졌다. 꾸밈없는 반응, 표정, 말 등 동식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마음에 가득 찼다. 인우로선 신선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우는 동식의 곁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회사로 돌아오기 전 파리한 안색으로 제게 안겨 잠들어 있던 동식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곁에 오래 붙어 있어본 적이 없어 몰랐는데 자신의 기운이 동식을 쇠약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초라한 모습으로 점점 말라가고 약해져가다 숨이 멎을 동식을 생각하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죽여서 함께 할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사실 지금도 수중에 넣고 싶어 속이 들끓고 있었다. 동식에게 가까워질수록 그 욕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하지만 동식은 살아있는 그 누구보다 더 살아있는 것 같고 그렇게 살아있어서 빛이 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의 제 모습을 돌아본다면 아이러니 하지만 그런 동식이 충분히 자기 인생을 살아보길 바랐다. 자신이 없다면 동식은 다시 생기를 되찾고 의미 있는 삶을 살 것이다.
버러지들만 없으면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입에 담배 개비를 물고 있는 동식의 부서 팀장이 옥상 문을 열었다. 난간이 있는 곳 까지 죽 걸어 간 팀장은 난간 대에 기대서 폰을 들여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인우는 기척도 없이 다가서서 폰을 들여다보았다. 대출금 독촉 문자가 화면을 길게 채우고 있었다. 팀장은 신경질적으로 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우겨 넣고는 담배를 뻑뻑 피우며 한숨을 쉬었다. 인우는 씨익 미소 짓고는 입을 열었다.
"죽으면 편해질 거야. 걱정은 산 사람만 하는 거니까."
팀장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인우를 화들짝 놀라 휘둥그레 해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마치 허공에 투명한 장막을 걷어내고 모습을 드러낸 것 같은 인우는 현실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풍겼다. 인우는 그의 반응을 개의치 않아하며 어깨에 손을 올리고 더 가까이에서 속삭였다.
"죽기 전에 유서나 쓸까?"
그러자 무언가에라도 홀린 듯이 눈의 초점이 흐려지며 눈에 어둠이 드리웠다. 팀장은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던 폰을 다시 꺼내들고 글자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빚을 많이 지고 있다는 내용과 이번 문제가 터진 계약 건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그렇게 장문의 문자를 적어 여러 명에게 전송한 그는 폰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인우는 움직임 없이 가만히 있는 팀장에게 살짝 고개 짓을 했고 팀장은 곧 난간 대를 넘어가 섰다. 아슬아슬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과 넥타이가 휘날렸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음에도 넋이 나가 보이는 그의 얼굴에선 공포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인우는 감흥 없이 그 모습을 까맣고 멀건 눈으로 보다가 난간 대를 툭툭 쳤다. 그러자 그는 서서히 몸을 기울이더니 허공에 몸을 내맡기고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소음과 함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주차되어 있던 차에 처박혀 사지가 기이하게 꺾인 시신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별 선물이에요, 동식씨. "
난간 대에 기대어 선 인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대리를 죽일까 팀장을 죽일까 고민 했었다. 둘 다 죽이는 것도 좋지만 그러면 착하디착한 동식이 인우의 짓임을 확신하고 죄책감에 시달릴 확률이 높았다. 둘 중 하나만 죽는다고 해도 어렴풋이 알긴 하겠지만 그래도 확신하는 것 보다는 나을 터. 고민 끝에 팀장이 선택 된 이유는 단순했다. 동식에게 손찌검을 하려고 했으니까. 그리고 팀장이 엉망이 된 계약 건에 대해 어느 정도 까발리고 죽게 만들었으니 대리도 몸 사리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인우는 눈을 감고 생기로 가득 차 해맑게 웃는 동식을 떠올렸다.
"한 번만 더 안아보고 싶다..."
누군가 옥상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인우의 모습은 점차 흐려졌다. 몇몇 사람들이 옥상에 도착했을 땐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텅 비어있고 고요했다.
.........
팀장의 자살 사건 이후로 들썩였던 회사는 거짓말처럼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팀장이 남긴 유서로 인해 대리는 제 발이 저려 퇴사를 했고, 동식은 오히려 재평가 되어 빈자리가 된 대리직으로 승진을 했다. 개인의 적정 업무보다 많은 일을 맡아 해왔던 게 드러났고 계약상의 문제점을 잘 파악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동식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회사 내에서는 상부의 눈에든 동식에게 잘 보이기 위해 친한 척 하는 사람들이 늘고 가족들은 승진한 동식을 자랑하고 다니기에 바빴다. 어떻게 보면 동식이 좋아하는 권선징악, 선의 승리처럼 보이는 결과였다. 하지만 동식은 그리 기쁘지만은 않았다.
예전에는 가진 게 없었다면 지금은 모든 게 거짓처럼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동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유일하게 자신을 그대로 봐주고 사소한 일까지 편하게 나누던 인우는 감쪽같이 사라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식은 시간이 나면 인우가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다녔다. 옥상, 엘리베이터, 화장실, 비상구 계단 등 머리카락 한올 보이지 않아도 끊임없이 찾았다.
"대리님, 오늘도 야근 하세요?"
같은 팀 직원이 퇴근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동식에게 말을 걸었다.
"네, 먼저 퇴근 하세요."
"김밥이라도 사다 드릴까요?"
"괜찮아요. 별로 배가 안 고파서."
동식은 미소 지으며 직원에게 손을 내저었다. 마지막으로 사무실에 남아있던 그 직원은 그럼 가보겠다며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자리를 떴다. 그렇게 동식만 혼자 남은 사무실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서류를 넘기던 동식은 종이 끝에 빨갛게 무언가 묻어나자 유심히 보다가 제 손을 살펴보았다. 종이에 베였는지 검지 손가락의 베인 자국에서 피가 나오고 있었다. 언제 베인 거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대자 찝찔한 쇠 맛이 났다. 부쩍 감각이 무뎌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다른 손으로 피 묻은 서류 끝을 문질렀다.
한숨을 푹 쉰 동식은 의자에 등과 머리를 기댔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매 번 동식은 자발적으로 야근을 했다. 혼자 사무실에 있다 보면 왠지 인우가 다시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몸이 비정상적으로 쇠약해지는 일도, 느닷없이 코피를 쏟는 일도 없어졌으나 동식은 정신적으로 지치는 일이 잦아졌다. 모든 일상이 지루하고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인우가 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고 생각한 게 벌써 몇 달이 지났다. 하지만 잊을 수 없었고 공허함만 더 커졌다. 그냥 자신이 너무 힘들어서 미쳤었던 건 아닌지, 그래서 환영을 봤던게 아닌지 하며 스스로를 정신 차리게 하려고도 해보았으나 동식의 감정은 너무 뿌리가 깊어 뽑아낼 수 없었다. 동식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받아 줄 대상이 없는 사랑을.
동식이 인우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며 사무실에 머무는 동안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곗바늘이 숫자 2를 향하고 있는 걸 보고 동식은 집으로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나타나지 않은 인우에 약간의 쓸쓸함을 느끼며 회사 건물을 나섰다. 회사 건물 밀집지역이라 그런지 불이 켜져 있는 건물이 보이긴 해도 길에 사람은 드물었다. 오고 가는 차량도 거의 없었다. 동식은 조용한 길을 걸으며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영 현실감이 없는 일상에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하고.
그렇게 멍하니 건널목을 건너는데 공기를 찢는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생각의 늪에서 강제로 끄집어내진 동식은 고개를 돌렸고 눈부신 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메우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시 주변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동식은 누군가에게 안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흐린 시야가 또렷해지자 저를 내려다보는 이를 확인할 수 있었고 동식은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이렇게 잡지 않으면 이 순간이 잠깐의 꿈으로 끝날 것 같았고 상대가 안개처럼 흐려져 사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그 짧은 말 한마디에 그리웠던 마음과 함께 온갖 감정이 녹아들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의 표정은 어딘지 우울해보였다.
"나랑 같이 있어줘요 인우씨, 제발"
"그런 말 하면 자꾸 나쁜 생각을 갖게 되요.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날 잊어요. 아직 기회는 있으니까."
인우의 말에 동식은 제게 빠르게 달려왔던 차가 지나간 자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인우를 보고 훌쩍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매일 힘들었어요, 내가 내 마음에 짓눌려 숨을 쉴 수 없었어요. 나 인우씨랑 있을래요. 그럴 수 있게 해줘요..."
인우는 엉엉 우는 동식의 눈물을 닦아주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동식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가볍게 눈가며 뺨에 입을 맞추었다. 훌쩍이던 동식은 금세 얼굴이 빨갛게 되어 아무 말도 못하고 약하게 인우를 밀어냈다.
"후회 안 하겠어요?"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인우씨를 선택한 건 후회 안 할 거예요."
동식은 인우를 올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인우는 알고 있었다. 동식이 자신을 찾아다닌 다는 것을. 하지만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가까이에 있을 수도 없었다. 분명 갖고 싶어질 테니까. 그런데 지금 동식이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 자신을 가져달라고, 함께 있어달라고.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었다. 동식이 후회한다 하더라도 정말 놓아줄 생각이 없어졌으니까. 인우는 동식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가고 싶은 곳 있어요?"
"네?"
"영화관이나 갈까, 동식씨 스릴러물 좋아한다고 했었죠?"
인우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동식은 이내 활짝 웃으며 인우 곁에 가까이 섰다. 언제 울었냐는 듯 싱글싱글 밝게 웃는 동식을 보며 인우는 동식이 여전히 빛난다는 생각을 했다.
서로 손을 꽉 맞잡은 둘은 어두운 밤거리의 도로를 걸어 사라졌다.
..........
전날만 해도 동식이 머물렀던 사무실은 어수선하게 분위기가 붕 떠있었다. 속닥거리는 직원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좋지 않았고 다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기색이었다.
"육동식 대리님 어제 퇴근길에 뺑소니 당한 거라면서요?"
"세상에, 뺑소니 차량 아직 못 찾았대? 어쩜 이러니? 일 진짜 잘하시던 분인데."
"성격도 좋으셨는데...."
탕비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마시던 직원 셋이 동일한 화제로 대화를 나누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나저나 굿해야하는 거 아니에요? 다른 부서는 멀쩡한데 왜 우리 부서만 사람이 둘이나 죽어나가?"
"굿은 무슨 굿이야,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요?"
"아, 속상해서 그러지."
"근데 이거 업무상 재해 아니에요? 퇴근길에 그렇게 된 거니까."
"돈 나오면 뭐해요. 대리님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가족 분들 어떡하면 좋아요..."
"뭐 별로 가까워 보이지도 않더만, 예전에 대리님 입원하셨는데도 못 온다고 막"
"그래요? 왜, 뭔데 뭔데."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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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화의 또 다른 꽃말: 사랑, 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