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단과 부재의 열매
W. 이함청
1.
다가올 봄을 앞두고 미련이 남은 겨울. 봄이라 하기엔 선선하고 겨울이라 하기엔 부드러운 날씨였으나 2월의 아침은 꽤 서늘했다. 코끝을 붉게 물들이는 추위에 인우는 평소보다 조금 두껍게 차려입었다. 바깥을 나서자 입김이 절로 나왔다. 그는 차를 몰고 이른 아침부터 본교로 향했다.
오늘은 그의 졸업식 날이었다. 학교는 인우와 같은 졸업생들로 북적거렸다. 모두 같은 옷을 걸친 채 웃고 떠들며 곧 다가올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우는 그들을 지나쳐 학과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 무리에 동화될 생각이 없었다. 졸업증서만 받고 집으로 갈 심산이었다. 원래 그는 아예 이곳에 오지 않으려 했다.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졸업식에서 얻는 것은 졸업증서뿐이었고 그것마저도 당일에 받아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찾아가도 무방했으므로 직접 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동생 지훈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기도 했다. 별다른 이유가 없는 이상 인우도 지훈의 졸업식에 참석해야 했다. 그는 동생이 꽃다발을 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은 꼴도 보기 싫었다. 그 옆에서 똑같이 웃음 지으며 사진 찍기는 더더욱 싫었다. 결국, 인우는 자신의 졸업식을 핑계로 빠져나갔다. 덕분에 예정에 없었던 졸업장을 받아와야 했다. 목적을 이룬 후 집으로 돌아가 저녁에 있을 가족 모임 전까지 개인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며 기분을 추슬렀다.
'서지훈 졸업식 끝나면 갈 테니까 기다려.'
누나인 지윤에게서 짤막한 문자가 왔다. 졸업 축하 겸 식사라도 같이하자는 말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뜻하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그냥 거기 쭉 있지 뭐하러 번거롭게... 빨리 쉬고 싶은데. 틀어진 계획에 기분이 뭉개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거절할 명분이 없어 지윤의 문자에 알겠다고 답했다.
졸업장만 가지고 나가기엔 시간이 애매했으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졸업식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4년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와 기쁨, 미래에 대한 불안이 한데 모여 각양각색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인우는 그들을 둘러보며 어떤 얼굴을 해야 그 속에 녹아들 수 있을지 고민했으나 좀처럼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들은 모두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굳이 대학 4년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대한증권에 가기 위한 절차로서의 기능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이해를 포기하고 바닥을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곳을 벗어나는 순간 더는 마주치지 않을 동기들과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눴다. 그렇게 졸업식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지윤은 나타나지 않았다.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보낼 생각이었다. 날이 추웠고 졸업식이 끝났으며 그는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었기에 졸업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것으로 최소한의 예의를 갖췄다고 결론 내렸다. 지윤에게 연락하려던 차에 새로운 문자가 도착했다.
'조금 뒤에 도착하니까 기다리고 있어.'
귀가하고 싶은 속을 들킨 것 같았다. 인우는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대체 왜 오는 건데. 그는 반듯하게 닦인 도로를 바라보며 지윤의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의 주위로 기쁨에 가득 찬 사람들이 수차례 지나갔다. 서로 사진을 찍고 축하해주는 화기애애한 장면이 여기저기서 연출되고 있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비슷하게 행동하는 그들이 신기하면서도, 얼굴에 가득 들어선 행복에 짜증이 났다.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환하게 웃음 짓는 그들이 불쾌했다. 괜스레 불만이 생기면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관계에 원인 모를 모멸감이 밀려왔다.
인우는 도로로 시선을 돌려 그들을 시야에서 지워냈다. 지윤의 차는 여전히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대학 진학 이후 거의 마주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과 단둘이 식사라니. 벌써부터 어색함이 들었다. 지윤과 인우 모두 생활 반경이 달라 대화는 고사하고 서로 만날 일이 드문 탓이었다.
금박 테두리로 장식된 졸업장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무렵, 고급 세단이 도로 가까이에 있는 인우의 옆에 섰다. 운전석 창이 열리고 지윤의 모습이 보였다.
"타."
왜 이제야 왔냐는 질책보다는 어색함이 더 큰 자리를 차지했기에 그는 군말 없이 반대쪽 문을 열었다. 좌석에 보랏빛 포장지로 쌓인 푸른색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생긴 건 장미인데 기존에 알던 색과 매우 달라 이질감이 들었다. 지윤은 작게 웃으며 옆자리에 놓인 생소한 색의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입 끝에 매달린 미소가 어딘가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 축하해."
졸업식에 보통 이런 색의 꽃을 건네주던가 하는 의아함이 들었지만, 굳이 긁어내고 싶지 않았다. 인우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꽃을 받아들고 조수석에 앉았다. 그는 한동안 꽃을 바라보았다. 온통 새파랗게 도배된 꽃이 너무나 낯설었다. 조화인가 싶어 끄트머리를 슬쩍 만져보았으나 물기를 가득 머금은 생화였다.
"늦어서 미안해. 차가 막혔어."
"괜찮아."
"식당 따로 예약해 뒀는데, 괜찮지?"
"응."
그 말을 끝으로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목적지로 가며 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본가에서 같이 살 때에도 필요한 주제가 아니면 대화한 적이 없는 사이였다. 인우는 그것을 기억해내고는 이 상황에 적응해 나갔다. 졸업식이라고 특별히 더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늘 하던 것처럼 침묵을 유지했다.
시선을 돌려 바라본 창밖은 익숙한 풍경을 비추고 있었다. 경로로 보아 그녀가 어디로 향할지 감이 왔다. 가족 행사가 있는 날 항상 가던 요릿집인 게 분명했다. 시내의 산 중턱에 음식점을 내는 곳은 한 곳뿐이었으므로 헷갈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문득 가족 모임이 점심으로 앞당겨진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가족 모임이야?"
"아니. 그냥 편해서 여기로 온 거야. 늘 이용하는 곳이니까.“
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인우는 꽃을 두고 내려야 하나 잠시 머뭇거리다 그대로 가지고 내렸다.
요리가 나올 때까지 둘은 말을 아꼈다. 정확히는 무슨 화두를 던져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탓이었다. 인우는 서로 맞는 주제가 있나 싶어 대화에 보편적으로 쓰이는 여러 단어를 펼쳤다. 자취, 회사, 여가, 취미 등 여러 주제를 짚어보았으나 무엇을 꺼내도 삐걱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대화할 거리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지윤이 화두를 던질 때까지 침묵을 유지했다.
첫 코스요리가 나올 무렵 지윤이 입을 열었다.
"...졸업하고 뭐 할 거야?"
"회장님 회사에 가기로 했어. 인턴으로."
"인턴?"
"실적 좋으면 금방 올려주신대."
"...그걸로 만족해?"
물어서 뭐해. 당연한 거잖아. 인우는 음식과 함께 말을 삼켰다. 온갖 노력 끝에 겨우 내디딘 곳이 안 좋을 리가 없었다. 대한증권 일가 사람이 인턴부터 시작하냐는 물음이었겠지만 인우는 애써 무시했다. 인턴은 그가 겨우 얻어낸 자리였다.
졸업 시기가 다가와도 아버지는 인우에게 대한증권에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화려하게 쌓인 커리어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무관심해 했다. 무시에 가까운 태도에도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부지불식간 쌓이는 무기력과 열등감을 필사적으로 덜어내며 부름을 기다렸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갔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대한증권에 가고 싶다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그러나 경솔히 말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와 함께 인우의 말은 일언지하에 잘려나갔다.
인우가 먼저 취한 행동은 점검이었다. 그는 시선을 안으로 돌려 4년간의 결과물 중 무언가가 잘못된 것은 없나 돌아봤다. 그러나 그것은 커리어를 쌓을 때마다 취한 행동이었기에 이제 와서 결점을 발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버려졌다는 생각이 들자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쌓은 4년의 결과물이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계제를 얻지 못한 것은 둘째치고 눈에 들지 않았다는 것이 죽을 만큼 아프게 다가왔다.
인우는 스스로를 꽤 많이 망가트리고 나서야 간신히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른 증권사에 지원하려던 차, 대한증권 인턴 자리가 주어졌다.
겨우 얻은 자리, 출발선, 기회의 시작. 희망이 갖은 수식어와 함께 피어올랐다. 인우는 다시 한번 기대를 품었다. 만약 정말로 그가 쓸모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인턴 자리를 주지 않았을 것이었다.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면 높은 자리를 고려해 보겠다는 말이 인우를 더욱 사로잡았다. 그렇기에 방금 지윤이 던진 물음은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지윤은 그런 인우의 표정을 보고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생각이 많은 듯 한동안 젓가락으로 음식을 뒤적였다. 인우도 지윤의 침묵에 따라 자연스레 음식에 집중했다. 그러나 무언가를 집어넣고 싶지 않아 깨작거리기만 했다. 두 번째 코스가 나왔을 때 지윤이 좀 전의 화두를 이어갔다.
"...계속 거기 있겠네.“
"응."
"싫지 않아?"
"왜?"
"겨우 인턴이잖아. 아무리 노력해도 받는 건 한정적일 거야."
"잘하면 높은 자리도 고려해 보겠다고 하셨어."
"그게 어디까지일 것 같은데."
비난이 담긴 지윤의 말을 인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간질하는 것도 아니고 왜 그런 말을 던지는 건데. 인우는 지윤의 입장과 그의 입장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지윤은 이미 나간 사람이고 아버지의 눈에서 벗어난 사람이기에 무엇을 하든 재고의 가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지윤은 후계 문제로 일찌감치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었다. 결코 지훈과 인우에게 뒤지지 않는 실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단칼에 그녀를 후계 자리에 들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반면 인우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껏 아버지의 눈에 들지 않았을 뿐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이제라도 돌아봐 주었으니 인정도 금방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 인우에게 지윤의 말은 간섭이었다. 지윤은 인우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해외 기업 알아봐 줄게. 아니면 창업을 하던지."
"...어떻게 얻은 자린데 여길 나가."
"네 실력이면 다른 회사 가고도 남아."
"내가 원하는 건 대한증권이야."
"그렇게 매달릴 필요 없어."
"있어. 회장님이..."
"그놈의 회장님. 그게 네 세상의 전부니?"
자존심을 밑바닥에서부터 깔아뭉개는 지윤의 태도에 인우는 인상을 썼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들어서 시비야.
"그렇게 좋으면 누나나 가."
"안그래도 가려고. 나 내일 출국해."
"...."
"서인우. 아버지 밑에서 나올 생각 정말로 없어? 네 실력이면 어디든 무리 없이 갈 수 있어. 좀 더 좋은 조건에서 시작할 수도 있고."
"집 놔두고 내가 어딜 가는데."
"네 실력 썩히는 아버지 밑만 아니면 다 괜찮겠지. 서지훈은 대학 졸업하면 바로 팀장 자리 준댔는데 넌 뭐야."
인우는 지윤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대한증권 지분을 차지할 입이 줄어야 얻을 것이 더 많아져서 그런 건가. 출국하는 마당에 입을 줄일 필요가 있나. 어차피 아버지와 갈라선 지윤에게 돌아올 지분은 얼마 없을 것이었다. 그런 인우의 생각을 읽은 듯 지윤은 선을 그었다.
"오해하지 마. 이건 날 위한 제안이 아니야."
"그러니까 왜,"
"조금만 생각해도 나오는 답을 왜 고민하고 있어. 어수룩한 곳에서 인생 허비하지 말란 거잖아.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면 끝날 일을 왜 힘들게 만드는 거야."
한 번도 그런 종류의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인우에게 지윤의 말은 어색하기만 했다. 그에게 아버지는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무한히 그를 채우고 움직였다. 그런 사람에게서 떠나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아버지나 대한증권보다 더 큰 세상이 있다고 해도 인우의 범주는 그곳이 끝이었다. 그곳을 유지하기 위한 '인정'이 몸속 깊이 낙인찍혀 있는 그에게 대한증권 밖의 세상은 환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우는 뜻을 바꾸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난 먼저 가볼게. 기사님 불러서 차 가지고 오라고 할 테니까 타고 가. 이따 저녁에 보자."
"......"
"서인우. 후회하지 마."
지윤은 입가를 닦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기 전 그녀는 건네준 꽃다발을 가리켰다.
"그 꽃. 불가능이란 뜻을 담고 있어. 네 상황이랑 맞아떨어지더라. 대한증권에 있으면 너도 그 꼴 나겠지. 아무리 핏대 세우고 노력해도 아버지는 널 절대 인정하지 않을 거니까. 그 끝에 네가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야."
불길한 말을 내뱉은 지윤은 미련 없이 나가버렸다. 인우는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지 못하고 꽃을 내팽개쳤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꽃잎이 산산조각 흩어져 나뒹굴었다. 졸업식 날 잡치는 기분을 선사한 그녀가 매우 싫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오지 말걸.
그 날 이후 인우는 임원진으로 올라서기 전까지 지윤과 만나지 않았다. 고의적이기보단 늘 그렇듯 각자의 길을 걸은 탓이었다.
2.
인우는 입사 후 놀랄만한 실적과 성과를 냈다. 낙하산이라는 단어 자체를 봉쇄하는 듯한 우수한 실력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그는 임원진으로 좀처럼 승진할 수 없었다. 빠른 스타트를 끊은 것과 달리 중반부에서 막힌 것이었다.
원인은 아버지의 제지였다. 아버지는 경험, 경력 부족 등의 이유를 들어 그의 임원 승진 건이 올라올 때마다 퇴짜를 놓았다. 그러한 상황이 몇 번 반복되자 임원진은 그의 승진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윗선에서 자르는 마당에 그들로서는 계속 요구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실적과 평판으로 따지면 벌써 승진하고도 남았어야 하는 마당에 윗선에서 제지당하자 화가 치밀었다. 뭔가 다른 뜻이 있겠지라는 생각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고 불안해졌다. 최상부의 차별적 태도로 인해 상사는 그에게 일감을 주지 않으려 했다. 다른 사람의 승진에 누가 되지 않도록 고의적으로 그의 실적을 낮추려는 것이었다.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쳐오자 문득 지윤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기이한 색의 꽃을 건네며 차가운 어투로 말했었다.
'아무리 핏대 세우고 노력해도 아버지는 널 인정하지 않아.'
지윤이 건넨 인정받지 못할 것이란 말이 뒤늦게 인우를 파고들었다. 잊으려 할수록 더욱 깊이 얽히는 것 같았다. 그럴수록 인우는 더욱더 회사에 매달렸다. 방해되는 사람을 쳐내고 도태시키며 기어코 성과를 내었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필사적이었다.
그런 인우의 노력은 조금씩 결과를 내는 듯했다. 그는 그렇게 몇 년을 버틴 끝에 임원진 명패를 받았다. 개인 공간이 마련되었고 더욱 높은 권한이 주어졌다.
인우가 임원진으로 올라섰을 무렵 지윤은 귀국해 대한증권에 들어왔다. 대한 계열사의 사람과 결혼하고 어느 정도의 지분을 가지게 되자 인우는 그런 그녀를 비웃었다. 아버지의 곁에서 떠나라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자리 욕심을 내나 싶었다. 인우는 모순적인 지윤의 태도에 비로소 그녀의 말을 떨쳐낼 수 있었다.
인우는 임원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높은 실적을 유지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인정받는 건 시간문제라 여겼다. 그는 유능하고 매력적이며 예의를 갖춘 사람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단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을 갈고닦았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아버지에게 시간과 노력은 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가 열심히 만든 가면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처럼 행동했고, 노력은 밑 빠진 독처럼 새기만 했다. 인우는 지치고 한편으론 짜증이 치밀었다. 언제까지 이런 비효율적인 짓을 해야 하나.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증명될 수 있을까.
아버지는 그가 보인 실력과 성과를 부정하듯 한참 늦게 들어온 서지훈을 전무로 승진시켰다.
지훈의 승진을 축하하는 가족 모임이 열렸다. 도저히 축하할 상태가 아니었으나 그는 묵묵히 자리에 참석했다. 쓰라린 속에 음식을 밀어 넣으며 축하의 말에 일조했고, 화목한 가정에 섞이기 위해 노력했다.
모임이 끝나고 각자 돌아가는 길에 인우는 지윤과 마주쳤다. 그의 차 앞에 서 있던 그녀는 그를 발견하자 꽃다발을 건넸다. 졸업식 날과 똑같은 형태의 것이었다. 이질적인 푸른 장미. 이건 지훈에게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매형과 달리 인우는 그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지못해 받아든 인우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지윤의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말투가 인우를 향했다.
"내가 뭐랬어."
인우는 극도로 피곤했기에 날카로운 신경을 숨길 여력이 없었다. 모임이 끝난 마당에 잘 처신할 이유가 없는 탓이기도 했다. 뾰족한 어투가 곧바로 지윤에게 날아들었다.
"...지금 누구 놀려?"
"이제라도 똑바로 해.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네 위치는 변하지 않아."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던가? 누나도 대한증권으로 돌아왔잖아."
"여기 잘되라고 들어온 거 아니야."
"그럼 뭔데."
"말해도 넌 이해 못 해."
"말 돌리지 마. 누나는 이럴 자격 없어."
"상황 파악 좀 해."
지윤은 할 말을 끝내고 떠났다. 매형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지윤의 뒤를 따랐다.
졸업식에서 받았던 것과 같은 푸른 장미가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벗어났다 생각했는데 착각하지 말라는 듯 여전히 앞에 놓여있는 것을 보자 분노를 누를 길이 없었다. 이래서는 대학 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속이 타들어 가다 못해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상황 파악 좀 해.'
지윤의 말이 뇌 속에 내리꽂히듯 박혔다. 인우는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여기서 뭘 어떻게 파악하라는 건데. 서지훈이 올라갔으니 딴생각 품지 말고 납작 엎드리라는 거야?'
질책과 비난을 가득 머금은 꽃다발을 인우는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차에 올라탔다.
지훈이 승진한 이후 모멸과 자격지심이 끝없이 피어올랐다. 참고 누르고 숨겨왔던 감정들이 수면 위로 떠 올랐고 그것을 자양분 삼아 분노가 기어나왔다. 끊임없이 그를 죄이며 억누르는 감정 탓에 업무를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가 없었다. 회의를 이끌다가도 다른 생각에 잠겨 주제를 놓치기 일쑤였고 불필요한 곳에 결재를 해버리는 바람에 손해 보는 계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치고 올라가야 할 판에 제자리에서 실수만 하고 있었다. 이대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빨리 원인을 해결해야 했다. 최상의 해결책은 서지훈을 죽이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를 제외하더라도 (또 다른 원인 제공자인) 대한증권 일가 내에 그가 없앨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 대한 경멸과 증오는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인우는 본격적으로 취미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극으로 이끌며 분노를 삭이고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한껏 감정을 분출한 후 정상인 행세를 했다. 그것은 부당한 일을 당할 때마다 응어리진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굳어져 갔다. 그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약하니까 당하는 거야. 살고 싶으면 네가 피식자가 아니란 걸 증명해봐.'
그가 살인을 할 때마다 주문처럼 외우는 말이었다. 정당화는 매우 쉬웠고 그만두기는 어려웠다.
취미는 한동안 그의 분노를 덜어주었고 부당한 대우에 잘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겉모습을 능숙하게 포장할 수 있었으므로 전처럼 완벽한 생활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로 인해 망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지훈에게 과한 보상을 내렸고 증명은 멀어져만 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언제까지고 대체수단으로 누를 수는 없었다.
위태롭던 생활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지훈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가 무릎을 꿇은 것이 촉매가 되었다. 그것은 인우가 보아오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증명 운운하며 끊임없이 몰아세우던 사람이 애정에 휩쓸려 이성을 세우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인우의 이성도 같이 끊어졌다. 인우는 가감 없이 주위의 모든 것을 부수며 강제적으로 그의 세상을 끝냈다. 자기 파괴적 행동은 그동안 쌓아 올린 것들을 모조리 무너트렸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손에 쥘 수 없었다.
3.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 지윤은 인우가 갇힌 교도소에 찾아왔다. 매달 영치금을 넣어주긴 했지만 그녀는 한 번도 인우를 찾아간 적이 없었다. 서늘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인우를 주시했다. 딱딱하게 굳은 가면 뒤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인우는 다리를 절며 의자에 앉았다. 만나기 껄끄러운 사이였기에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지윤은 제한된 시간을 허투루 쓸 생각이 없다는 듯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왜 왔어."
"...이 정도면 오래 버텼어. 이제 다른 선택을 하는게 너한테도, 대한증권에도 좋을 것 같아서."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할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인우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핏줄이 어디 가겠어.
"...신경 꺼."
"평생 감옥에서 썩을 텐데 그건 서로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잖아. 넌 너대로 쓰레기들과 엮여 고생할 테고 대한증권은 망가진 기업 이미지 때문에 고생할 거야. 이쯤에서 서로에게 좋은 방향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싫어."
"그 더러운 곳에서 계속 살아가고 싶어?"
"내가 알아서 해."
인우는 핏발 선 눈으로 지윤을 노려보았다. 자살을 종용하는 말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에 수십 번씩 찾아드는 생각이었다. 재소자들에게 끌려가 맞거나 하루종일 방에 갇혀 있을 때 그것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다. 죽으면 이럴 일 없잖아. 벌레같이 살 바엔 차라리 죽어. 선명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떨치려 해도 계속 주위를 맴돌았다.
"서인우. 살고 싶구나."
이 꼴로 여기 있는 거 보면 모르겠어? 인우는 말을 삼키고 조용히 그녀의 시선을 받았다. 말해봤자 조롱이 날아올 게 뻔했다. 어서 시간이 흘러 지윤이 떠나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윤은 그의 침묵에서 원하던 대답을 들은 것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기회를 줄게."
"....."
"다만 지금은 아니야. 거길 나와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충분히 생각해봐."
지윤의 말은 죽음을 가리키고 있지 않았다. 대체 왜? 그 선택이 그녀에게 어떤 이익으로 돌아오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지윤은 인우의 복잡한 생각을 단칼에 끊어내듯 답을 제시해주었다.
" 난 네가 대한증권에만 발들이지 않으면 뭘 하고 다니든 상관 안 해."
"......"
"계속 말했잖아. 대한증권에서 나가라고. 왜 말을 안들어서 일을 이 지경으로 키워."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돌려 말하지 않을게. 잘 들어."
지윤의 표정에 답지 않은 긴장이 담겨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숨 막히는 곳에서 사는 네가 안타까웠어. 그건 지금도 변함없이 그래. 내 행동을 넌 간섭으로 생각했겠지만 난 진심이었어. 네가 아버지 밑에서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감정을 표현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때늦은 고백으로 얻고 싶은 게 뭘까. 인우는 날것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 번도 접한 적 없는 온기를 건강하게 받아들이기에 그는 너무나 망가져 있었다.
"내가 준 꽃 기억나? 그거... 기적이라는 다른 뜻이 있어. 항상 불가능이라고만 말했었던 거 미안해. 내가 미숙했었어."
"..."
"시간 다 됐네. 가볼게. 부디 좋은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 바깥에서 널 볼 수 있도록."
지윤은 할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차가운 표정 뒤로 복잡함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인우를 잠시 응시하다 사라졌다.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울음을 참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지윤은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그에게 나갈 기회를 준다는 것은 그녀가 사회적 기준에서 판단한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인우는 그녀가 내보인 감정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위하는 척하면서 간섭하길 좋아한다는 자신의 판단을 부정하기 싫었다. 대한증권에 발을 디디기 전부터 그를 끌어내리려 했던 사람, 대한증권에 들어가고 나서는 그를 압박하던 사람. 그녀를 표현할 수 있는 비난의 말은 많았으나 좋게 칭할 수 있는 말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인우는 지윤이 내보인 감정을 저만치 밀어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교도소까지 온 마당에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의 일을 상상하는 것으로 생각을 돌렸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다시 시작하는 곳에서 대한증권은 논외였다. 무언가를 쌓아 올릴 틈마저 다 부수고 나왔으므로 대한증권에 돌아갈 수 없음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해보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증명의 대상이 사라진 마당에 굳이 거길 들어가 고통받는 건 사양이었다.
인우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청사진을 그려보았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무엇 하나 그려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벗어난 삶이 가능할까, 밖이 기회가 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껏 그의 세계는 대한증권이 전부였다. 그것을 한껏 망쳐놓기 전까지는 거길 벗어날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않았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거길 벗어나면 뭐가 남지?
처참히 부서진 대한증권 속에 그는 아직도 발을 들이고 있었다. 그곳을 벗어난 어떠한 미래도 잡히지 않았다. 그토록 증오했으면서 그 외의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환청이 다시금 그를 덮쳤다.
'넌 이미 끝났어. 무슨 미련이 있어서 나갈 생각을 해?'
'밖에 나가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텐데. 바깥이 정말 기회일 거라 믿는 거야? 이만 죽는 게 좋지 않을까.'
'그 꼴로 이제 와서 뭘 다시 시작하겠다는 거야.'
"부디 좋은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
환청 위로 지윤의 말이 덮어졌다. 간결한 문장이 죽음을 품고 다가왔다. 인우는 눈을 감았다. 그에게 그곳에서 벗어나라는 말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었다.
4.
이제 막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 평범한 오후였다. 지윤은 자택으로 배송된 사망통지서를 받고 한참 동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인우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에서 온 것이었다. 통지서는 간결하고 딱딱한 문체로 그의 사인(死因)과 추후 시신인계 절차를 통보했다.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찾아가기 전부터 어렴풋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을 가정했었다. 단지 그 선택에서 벗어나 기적을 택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가정은 확신이 되었고 명확한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그는 그의 세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지윤은 그가 아버지에게서 벗어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증명에 얽매이지 않았다면, 아버지에게 붙들리지 않았다면, 기회를 받아들였다면. 기대할 수 없는 가능성들이 심정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대한그룹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호조를 보였다. 기업 이미지에 누를 끼치는 존재가 사라졌기에 그로 인해 파생되는 골칫거리 또한 자동적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직접적으로 축하를 건네는 사람은 없었으나 다들 안도와 기쁨 속에 있었다. 주가는 다시금 오르기 시작했고 회사는 조금 더 활기를 띠었다.
그의 장례는 여러 사람의 뜻을 반영하여 간소하게 치러졌다. 건네받은 시신은 별다른 확인절차 없이 태워졌고 이름 모를 오래된 나무 밑에 묻혔다. 지윤은 그런 그의 죽음에 조금의 연민을 느꼈다. 그에게서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피해자가 아닌 지윤에게 인우가 죽인 사람들의 죽음은 철저한 타인의 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속 편한 정당화와 몸에 밴 겉치레, 일말의 동요 덕에 지윤은 인우의 죽음 앞에 서 있을 수 있었다.
한때 서인우라는 인물을 구성하고 있던 것이 흩뿌려진 나무에 그의 이름이 적힌 패목이 걸렸다. 그의 죽음이 가시화되는 순간이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그의 죽음에 지윤은 가져온 꽃을 내려놓지 못하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적은 피어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