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言의 不在
W. 청명
여자가 칼에 찔렸다. 꺄아악! 하는 높은 고음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공포와 고통에 물든 눈이 너무도 선명했다. 그런 여자를 바라보는 흉기를 든 남자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보이는 남자의 표정을 멍하니 응시하며 동식은 '아, 저 여자가 나였다면.' 따위의 생각을 했다. 어차피 현실이 되지 못할 망상에 불과했다. 겨우 버튼 하나만 누르면 전부 지워질 것들이었다. 동식은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을 검게 지우는 대신 두 눈을 감아 세상을 검게 물들이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동식의 세상은 어둠에 잠겼으나, 소리까지 지워내지는 못했다. 검은 세상 속에서 짧게 들려오던 남자의 목소리가 곧 비명소리로 바뀌었다. 방금까지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던 남자가 갑자기 왜. 그 이유가 뭔지, 이다음에는 어떻게 되는지. 일주일 전의 자신이라면 알고 있었을 텐데. 동식은 손의 쥔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며 북받쳐 오를 것만 같은 감정도 같이 가라앉혔다. 동시에, 적막이 찾아왔다.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소리가 기나긴 적막을 깨트렸다. 동식은 천천히 눈을 떠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영영 감겼으면 했던 눈이 너무도 쉽게 뜨였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워 동식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가만히 눈을 뜨고 있자니 세상이 환했다. 열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밝았다. 마치 어서 일어나라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동식은 몸을 일으켰다.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선택권은 없었다. 오늘도 살아가는 수밖에. 침대에서 벗어나서는 빠르게 움직였다. 회사에 지각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출근 시간까지 딱 10분을 남겨놓고서 회사 건물 앞에 도착한 동식은 쉽게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겨우 발을 떼었다가 차마 세 걸음 이상을 넘기지 못하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혹시라도 그 사람을 만나게 될까 두려웠다. 아직 어떻게 대처해야할지도 정하지 않았는데. 복잡한 기분에 휩싸여 애꿎은 바닥만 빤히 노려보던 동식을 도운 것은 기억을 잃은 뒤 첫 출근 때부터 본인이 육동식의 베프였다 주장하던 재호였다.
“어, 육동식이! 왜 그러고 서 있어? 너 그러다 지각한다? 또 얼마나 잔소리를 들으려 그래. 넌 괜찮을지 몰라도 난 듣기 싫다. 얼른 들어가, 들어가!”
오늘도 겨우 출근 시간에 맞춰 출근하던 도중이던 재호가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는 동식을 발견하고는 거리낌 없이 동식을 붙잡고 끌고 들어갔다. 재호의 배려 없이 문 안으로 밀어 넣는 손길에 동식은 망설이던 것이 무색하게 너무도 쉽게 회사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출근을 하고서도 동식은 쉽게 일에 집중하지 못한 채 컴퓨터를 켜놓고 멍하니 화면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작업 기억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라 업무 방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작업 파일을 보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상무님! 오셨습니까?”
최대철 팀장이 호기롭게 맞이하며 외친 상무, 라는 말이 들리자 몸을 움찔 떤 동식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눈을 꾹 감았다. 스스로를 꽉 감싸 안은 동식의 몸이 잘게 떨리는 듯도 했다. 동식이 일에 집중할 수 없었던 원인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었다. 지금 동식이, 절대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한 사람. 그와 만나게 될까봐.
대한증권 상무, 서지훈.
동식이 출근을 망설이고 일에 집중하지 못한 원인이었다. 동식이 지훈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다. 동식은 모르고 지훈만 알고 있을 그 모든 일들이 지금의 동식에게는 공포가 되어 돌아왔다. 마주쳐도 아무것도 못한 채 굳어 멀뚱히 바라보게 될 그 상황이,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치게 싫었다.
안녕히 가십쇼, 상무님! 지훈을 배웅하는 소리가 들리고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동식을 무심코 본 재호가 동식을 툭툭 쳤다.
“뭐야, 너 어디 아파? 괜찮냐?”
“아, 아아... 어... 괘, 괜찮아...”
재호의 목소리에 그때서야 동식이 스스로를 꽉 잡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확 풀린 긴장에 잠깐 머리가 띵했다. 진짜 괜찮은 게 맞는지,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계속 물어오는 재호를 몇 차례 더 괜찮다는 말로 겨우 떨어트린 동식이 이미 멀리 가고 있는 지훈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마주치는 걸 원하지는 않았는데, 그렇다고 아무런 말도 반응도 없이 제 갈 길을 가는 모습에 괜히 서러움이 몰려왔다. 역시, 기억을 잃었다고 감정마저 사라지는 건 아닌지. 쓰린 가슴을 달랠 새도 없이 울컥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며 동식은 이를 꽉 물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 아무리 속으로 되새겨도 지훈을 향한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동식의 시선이었으나, 동식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지훈의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게 되어 방황하던 동식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가방에 닿았다. 정확하게는, 가방 안에 들어있을 다이어리에. 다이어리는 기억을 잃은 동식에게는 유일하게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단서였다. 그리고 동식이 추측하건대 기억을 잃게 된 원인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었다. 한참을 그곳을 응시하던 동식의 시선이 이내 허공에서 흩어졌다.
***
다이어리의 내용은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연애일지’였다. 기억을 잃기 전의 동식이 적어놓은 연애일지. 평범한 연애일지는 아니었다. 우습게도 즐겁거나 기쁘거나, 설레는 일 따위는 하나도 적혀있지 않았으니까. 동식의 일지에는 오로지 자신의 애인 때문에 힘들고 아프고 상처받았던 일들만이 가득히 담겨 있었다. 혹시라도 들켜서는 안 되었기 때문인지 애인의 이름 한 글자 적혀있지 않은 그 다이어리를 읽으며 동식은 펑펑 울었다. 자신이 쓴 것이 맞단 것을 증명하듯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갈 때마다 저려오는 가슴을 부여잡고서.
한 차례 읽고 난 뒤로 다시 다이어리를 읽기는 쉽지 않았다. 너무 울었던 탓인지 눈가는 따갑게 쓰려왔고 가슴은 아프게 저려왔다.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이 지쳐있었다. 하지만 그 다이어리가 유일한 단서였다. 다이어리에 적힌 바로는 이미 자신은 애인의 마음이 제게서 떠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차마 놓을 수 없어 붙잡고 있었다. 상대는 아무리 상처를 주고 마음이 없음을 티내도 절대 이별만큼은 입에 올리지 않았고, 자신도 먼저 이별을 말하기엔 용기가 없었다. 그런 상황이 이어지다보니 상대는 동식에게 상처를 주는 것에 재미를 들린 듯했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차마 놓지 못하고 더 큰 상처를 감내한 것은 동식이었다. 참 바보 같다 싶으면서도 저릿하게 뛰고 있는 가슴을 생각하면 얼마나 좋아했으면 싶어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나구나 싶어 동식은 씁쓸히 웃었다.
기억을 잃었으니 차라리 모르는 척, 자신도 마음이 식은 척. 그렇게 잊어볼까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조차 쉽지 않을 것을 깨달은 것은 상대가 같은 회사의 사람이라는 것을 다이어리를 통해 알게 되면서였다. 같은 회사 사람이라면 전혀 모르는 사람인 척 하는 것은 어려울 터였다.
결국 도달한 결론은 최대한 아무 감정 없이, 소설 한 편을 읽듯이 다이어리를 읽으면서 상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마음을 다잡았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슬픈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에도 감정이 동하는데, 무려 자신의 일을 아무렇지 않게 되새기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래도 동식은 꾸역꾸역 다이어리를 읽었다. 다시는 이 다이어리에 적힌 것과 같은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이어리에서 알 수 있는 정보를 하나하나 다른 종이에 옮겨 적으니 어느 정도 구체적인 정보가 나왔다. 정리해보자면 이랬다.
하나, 육동식과 같은 회사 사람으로, 직급은 더 높다.
둘, 동식보다 키가 큰 남자다.
셋, 돈이 궁하지 않고 막 써도 상관없을 정도로 돈이 많고 회사 내에서도 매우 높은 직급이지만, 동식과 비슷한 연령대다.
넷, 연애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 때문에 이름이나 다른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반대해 사적으로도 직급 외의 호칭으로 부른 적이 없다.
다섯, 아닌 듯 보여도 사회의 시선에 민감하다.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몇 안 되는 정보들이라도 동식에겐 중요했다. 더군다나 세 번째 사항의 경우, 지금 동식의 나이를 생각해보았을 때 그 후보를 확 줄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겨우 몇 줄 짧게 정리된 내용이 적힌 종이를 내려다보며 동식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능한 차분히 생각하려 노력했다.
***
회사를 나가지 말까 수십 수백 번은 고민했으나 월요일이 되어 결국 동식은 회사로 향했다. 계속 말없이 회사를 안 나갈 수 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어떻게 되든 일단 맞부딪혀보자 강하게 마음먹고 지갑에 들어있던 명함의 도움을 받아 제 자리를 찾았다.
떡하니 사원 육동식. 하는 이름이 적힌 자리를 발견한 동식은 조심스레 그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저어, 여기가 혹시...”
“응? 어, 도, 동식...! 너, 너어...”
“저...를, 아세요?”
“...엥?”
동식이 말을 건 사람은 대한증권 자산운용 3팀 대리, 박재호였다. 동식이 말을 걸자 유난히 놀란 티를 내던 재호는 저를 아느냐 묻는 동식의 말에 재차 놀란 듯 동식을 보았다.
이어서 대화를 나누게 된 곳은 비상구 안이었다. 동식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게 된 상황을 얼추 설명했고, 재호는 기억을 잃은 동식의 상황을 얼추 파악했다. 재호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비췄다. 아이고, 어쩌다가~로 시작한 말은 생각보다 더 길어졌다. 그 말의 홍수 속에서 동식은 과거의 자신이 -재호 생각엔- 재호와 매우 친했으며 연애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것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동식이 애인이라는 단어를 꺼내기 무섭게 응? 애인? 에이, 설마 나 몰래 애인이라도 만들었을까봐? 아냐, 아냐. 있었으면 내가 먼저 얘기해줬지. 하고 돌아오는 답을 들으며 동식은 가슴이 답답해짐을 다시 한 번 느껴야했다.
“근데, 아까는 왜 그렇게...”
“응? 아, 아니이... 원래 일찍일찍 출근하던 애가 출근 시간이 다 돼도 오질 않으니까 이상하다~ 싶던 차에 갑자기! 똥식이 너가 말을 거니까 놀라서 그랬지이...!”
대답을 하면서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 것이 뭐 숨기는 거 있어요. 하고 알려주는 듯했지만 동식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숨기는 게 있다면 지금 물어본다고 해서 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대신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마지막으로 혹시... 내가 많이 힘들어했어?”
“어, 어~. 그렇지 뭐.”
질문 자체는 별 거 없었으나 무엇 때문에, 라는 말이 없는 문장이었다. 누군가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그저 일 때문에 힘들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시선을 은근히 피하는 재호의 설렁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재호는 연애 사실을 모른다고 했는데. 지금과 그 때의 대답을 비교 해봤을 때 그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럼 뭔가 따로 힘든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무언가가 있는 건가.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정리하며 동식은 재호에게 고맙다며 웃어보였다.
주변 사람으로부터 정보를 얻기는 어렵겠다는 판단을 한 동식은 사내 게시판을 조사하기로 방향을 바꿨다. 우선은 그룹 임원들을 추리고, 그 중에서 나이와 미혼이라는 조건을 추가해 다시 추렸다. 그 중에서 재력이 충분한 사람을 추리고, 그렇게 맞는 사람을 찾아냈다.
결과적으로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은 딱 둘이었다. 대한그룹의 그룹의 간부직이고, 동식과 동년배일 정도로 나이가 어리며, 재력이 매우 충분한 사람. 대한증권 회장인 서충현의 아들인 대한증권 서인우 이사와 서지훈 상무. 내가 이런 사람들 중 한 명과?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이런 사람이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했다.
***
둘 중 하나. 5할의 확률이지만 그 5할의 간극을 줄이기가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걸어볼 수 있는 희망은 휴대폰이었다. 사고 날 잃어버린 뒤로 찾지 못해 재발급을 받은 휴대폰에 혹시라도 남아있을 내역. 조금의 기대를 갖고 확인해 보았지만 결론은 원점이었다. 찾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새로 발급받기까지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에도 그 흔한 연락 한 번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동식의 가슴을 찔렀다. 그 다이어리에 적힌 내용이 전부 가짜는 아닐까. 그런 희망 아닌 희망도 품어보았다.
그래, 전부 내 망상이었던 거야.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작은 의구심은 있었지만 그것뿐이었으니까. 어제와는 달리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해 일에 집중했다. 그것이 깨진 것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재호 때문이었다.
“똥식아. 너 그 어제...”
“뭔데 그래?”
“어어, 아니야, 아무 것도!”
말하기를 망설이는 모습에 한 마디 얹었을 뿐인데 급히 아니라며 말을 돌리는 재호를 보며 동식은 무언가는 있긴 한가 보다하고 짐작했다. 망설임을 반복하는 재호에게 괜찮아, 말해봐, 그냥 궁금해서 그래. 우리가 친했다면서 그거 하나 말해주기가 그렇게 어렵냐. 몇 번을 설득했다.
“너 힘들어 한 거... 그거 혹시 서지, 아, 아니야! 진짜로 아무것도 아니야! 그니까 관심 갖지 마. 알겠지?”
“어, 어... 그래. 됐다, 됐어.”
동식의 설득에 재호가 입을 열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중간에 더는 못 말하겠다며 선을 그어버리는 바람에 전부 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재호가 입에 올리려했던 이름 두 글자만은 똑똑히 들은 동식은 재호를 더 설득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 서지훈. 재호는 서지훈 상무를 말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왜? 육동식의 연애 사실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재호가 서지훈 상무를 언급하는 거지? 갑자기 엉켜드는 머릿속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결국 동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생각에 잠겨 커피를 타고 있자니 누군가가 동식에게 다가왔다. 흘끔 누가 왔는지 확인 한 동식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멈칫했다. 기억을 잃은 뒤로 보는 것은 처음이나,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대한증권 서인우 이사. 그래, 그 사람. 여기까지는 왜? 혹시, 싶은 생각을 애써 무시하며 커피를 타는 것에 집중하고 있자니 인우가 동식의 가까이 다가와 섰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동식에게 말을 걸었다.
“... 동식 씨, 혹시 요즘도 내 동생 때문에 많이 힘들어요?”
“네? 어, 그게 무슨...”
“아닌 척 하지 말고. 며칠 동안 연락 한 통 안하는 것 같던데.”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질문에는 걱정스러움이 가득 담겨있었다. 순간 인우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동식이 의문을 보였으나, 인우는 단호했다. 그런 인우의 말에 동식은 모든 게 얼추 맞아떨어짐을 느꼈다. 아, 그 다이어리가 진짜구나. 그렇게 아니길 바랐는데 결국은. 커피를 타던 것도 잊고 멍하니 테이블을 응시하던 동식이 동식 씨? 하고 자신을 부르는 인우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인우를 보았다.
“무슨 일... 있는 거 맞죠?”
“아, 아뇨...! 무슨 일은요! 걱정 않으셔도 돼요, 이사님!”
계속해서 자신을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인우를 아무 일 없다, 괜찮다 몇 번이고 언급하며 겨우 돌려보내고 동식은 겨우 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양 조절에 실패하긴 했는지, 커피가 너무도 썼다. 결국 동식은 빈손으로 제자리에 돌아왔다.
다이어리에 적힌, 동식의 애인은 서지훈이다. 이제는 확실해졌다. 드디어 가장 큰 수수께끼 하나가 풀렸지만, 동식은 되려 더 암담함을 느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며칠간 만나지 않으면서도 먼저 전화 한 통, 문자 하나 보내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걸, 정말 사귄다고 말할 수는 있긴 한 건가. 입 안이 썼다. 회사로 출근해 무턱대고 상무실 앞을 찾아가 서성대보기도 하고, 문자를 보내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전화를 걸어도 보았지만 아무리 오래 신호음을 듣고 있어도 결국 들려오는 목소리는 지훈의 목소리가 아니라 안내 내레이션뿐이었다. 그 오랜 기다림만은 싫었던 나머지 동식은 전화를 걸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생각 외로 회사 내에서 동식이 지훈을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고, 문자는 보내면 보낼수록 동식이 문자를 보낸 기록만이 쌓여갔다. 동식으로부터 전송된 문자만이 수두룩하게 쌓여있는 지훈과의 채팅창을 한 번 쭉 올려보던 동식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원래도 이랬던 건지. 이렇게 답장이 없어도 과거의 자신은 지금처럼 묵묵히 계속해서 문자를 보냈을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만나지도 연락을 하지도 못한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는데 그 어떤 응답도 없는 지훈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결국 이렇게 헤어지는 건가. 하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 이렇게 지훈에게 대답도 받지 못하는 문자를 보내는 것도 지치고, 그렇다고 신호음과 안내 음성만을 듣게 될 전화를 걸 용기도 없었다. 문득 회사에서 마주쳐도 그냥 모르는 사람인척 지나가던 지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사람인데. 나도 그냥 모르는 척 있는 게 맞는 선택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꾸만 동식에게 자리했다.
그래,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몇번째 되새기는 건지 모를 말로 또 한번 자신을 속이며 동식은 화면 속 지훈의 프로필을 응시했다. 이렇게 계속 보내게 될 걸 알면서도, 끊어내야지 생각하면서도 여태까지 같은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싫었으나 뭐가 그렇게 미련이 남았는지 결국은 제자리였다.
[상무님.]
몇번을 거듭해 고민하고, 채팅을 치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결국 보낸 말은 겨우 그것이었다. 상무님. 그 문구 옆에 자리하고 있는 1이라는 숫자가 뭐가 그렇게 크게 보이는지.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며칠이 지나야 겨우 사라지던 그 1이라는 숫자가, 사라졌다.
"...어?"
당황한 동식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혹시나 오류일까 나갔다 들어와 봐도 역시나 숫자는 지워진 채였다. 놀람에 커진 두 눈이 괜한 기대감과 설렘에 빛났다. 그렇게 1분, 2분, 5분, 10분을 기다려 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역시나. 실수로 들어오기라도 한 건가. 기대했던 만큼 큰 씁쓸함과 허무감이 동식을 덮쳤다. 난 또 뭘 기대했던 거람. 괜히 차오르는 눈물에 고개를 설레 젓고서는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 검은 화면에 비치는 제 모습이 보기 싫어 동식은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그렇게 실망하고 체념했음에도 또 괜한 기대감 탓인지. 아니면 그저 반사적인 행동이었는지. 동식은 바로 내려놓은 휴대폰을 집어 들어 화면을 확인했다. 혹시나 아닐까 꾹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떨리는 눈으로 화면을 보자, [서지훈 상무님] 하고 적힌 이름이 떡하니 떠 있었다.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뚝 떨어져 내렸다. 이번에는 슬퍼서가 아니라, 너무 기뻐서. 답장 한 번 받은 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며 급히 제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동식은 바로 확인했다.
[서지훈 상무님: 왜]
와 있는 것은 왜, 하는 겨우 한 글자뿐인데도, 그조차 너무 좋아서 동식은 괜히 억울하기까지 했다. 당연하게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답장이라, 저 한 글자마저도 기뻤다. 기쁨도 잠시 동식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저 혼자 보내는 문자였기 때문에 달리 할 말을 생각해두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짜내 보낸 답장은 동식이 생각해도 바보 같았다.
[저녁은 드셨어요?]
[서지훈 상무님: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저녁을 먹어?]
[아, 잘못 보냈어요... 저녁 언제 드시려구요...?]
이제 4시를 막 넘어가고 있는 시간에, 저녁은 먹었냐니. 동식은 제 바보 같음을 탓하며 주먹을 쥐고 제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하필 말을 해도...! 급히 말을 바꾸기는 했지만,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급작스러운 쪽팔림에 동식이 침대 위로 무너져 내렸다. 몇 분이 지나서야 다시 알림음이 들렸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서지훈 상무님: 나도 몰라.
야, 톡 하지마.
나 지금 바빠!]
의구심을 안고 확인한 내용은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럼 그렇지 싶다가도 답장을 받았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원래의 지훈라면 그냥 무시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은 것만이라도.
***
그렇게 동식에게 쪽팔린 기억으로 남은 그 날 이후로 지훈이 문자에 답장을 해주거나 회사에서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보내고 받아주는 일이 점차 잦아졌다. 단지 무시로 일관하던 지훈의 변화에 기뻐하기도 잠시, 동식은 그런 지훈의 변화에 의문을 가졌다. 갑자기, 왜? 그런 의문을 접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노력 해봐도 연인 사이에, 겨우 문자에 답장이 오고 인사를 주고받는 것에도 기뻐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헤어지잔 말을 해야지, 해야지. 몇 번을 마음먹고 다짐 해봐도 결국에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는 본인이 있었다. 아직 기억을 찾지도 못했는데, 계속해서 가방에 넣고 다니는 저 다이어리의 주인이 육동식 본인인 것이 이렇게까지 와 닿을 줄은 몰랐다. 차라리 저 다이어리를 찾지 않았으면, 읽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싶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나마 숨통이 트일 때는 인우가 동식을 찾을 때였다. 인우는 유일하게 이 모든 일을 알고, 동식을 응원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지훈과의 관계에 대해 묻는 것이 때로는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그것도 전부 저를 돕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동식은 그저 감사했다.
“내 동생, 그러니까 지훈이랑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요? ... 지훈이가, 동식 씨 기억 잃은 건 알아요?”
“아, 아니요... 아마 모르시지... 않을까요.”
“저런... 동식 씨가 직접 지훈이한테 말하기 어려우면, 내가 말해줄까요?”
“아니에요!! 제가... 제가 직접 말해야죠... 이사님께 그렇게 폐를 끼칠 생각도 없구요...”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인우의 말에 동식이 손사래를 쳤다. 지금도 충분히 인우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이상으로 도움을 받는다면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힘들어질지 몰랐다. 말을 하면서도 이미 충분히 폐를 끼친 것 같다는 생각에 동식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그런 동식을 보던 인우가 픽 웃고는 동식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요. 할 수 있을 거예요. 잘 해봐요, 동식 씨. 응원할게요.”
그렇게 말을 마치고 자리를 뜨는 인우를 보던 동식은 묘한 느낌을 느꼈다. 이게, 무슨 감정이지. 저 멀리 가고 있는 인우를 멍하니 쳐다보던 동식이 이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럴 때가 아니지. 방금 전의 대화로 확실해졌다. 어떻게 되든, 일단 부딪혀 봐야했다. 그래, 이사님의 응원도 받았잖아. 할 수 있어. 그렇게 되새기며 동식은 상무실이 있는 곳을 응시했다.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고는 해도 자꾸 망설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상무실은 뭐가 그렇게 가까운지, 그것마저 원망스러워졌다. 결국 눈을 꽉 감고 한 번 질러보자는 식으로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저, 상무님...!”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가 지훈 앞에 선 동식이 다짜고짜 지훈을 불렀다. 용기 있게 부르기는 했으나 그 다음 말을 생각해 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말이 턱 막혀 눈을 데구룩 굴렸다. 그런 동식을 힐끗 본 지훈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육동식. 뭐,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고?”
저녁을 같이 먹어? 순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질문이 들어오자 동식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게 아닌데... 아니, 갑자기 밥은 왜...! 그런 자신의 행동에 황당과 어이없음을 느끼고는 지훈을 바라보자 만족스럽다는 듯 씩 웃고 있는 지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동식은 또 이해할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지금, 내가 같이 밥을 먹겠다고 해서 저렇게 웃는 거야...? 도데체 왜. 복잡한 동식의 머릿속과는 달리 지훈은 쾌활하게 동식에게 요구했다.
“그래, 저녁은 됐고. 나랑 술이나 같이 마시러 가자. 8시까지 와. 주소는 내가 톡으로 보내놓을게.”
그렇게 제 할 말만을 마치고서는 손을 휘휘 젓고 밖으로 턱짓하며 나가봐. 퍽 단호하게 말하는 지훈을 보던 동식이 결국 저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지훈에게 휘둘리기만 하고 정작 하려고 했던 말은 하나도 꺼내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해 왜 그랬어, 왜... 하고 자책하며 제 머리를 콩콩 두드렸다.
제대로 된 마음의 준비도, 기억도 무엇 하나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훈과 함께하게 될 술자리를 생각하면 너무도 절망스러웠으나, 차라리 잘됐다 생각하기로 했다. 술의 힘을 빌려 취한 상태라면, 멀쩡할 때보다는 좀 더 쉽게 지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그렇게 실낱같은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자. 정말 단단히 준비해가자. 그렇게 마음먹으며 동식은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가득 담아 제 주먹을 꽉 쥐었다.
***
반쯤은 강제로 지훈에게 이끌리듯 오게 된 술자리에 동식은 불편한 듯 제 손만을 만지작거렸다. 지훈은 그런 동식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자연스럽게 술을 주문시켰다. 물론, 동식에게는 마실 술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다. 그저 네 것도 같이 시켰다. 하는 통보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술이 나오는 속도는 빨랐다. 사람은 둘인데, 나오는 잔은 여럿이었다. 달리 더 올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둘이 마실 양이었다. 허망한 시선으로 지훈을 바라보았으나 왜, 뭐. 안 마셔? 하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라 동식은 쭈뼛대는 동작으로 잔 하나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운 법이라고, 한 잔을 비우기가 어려웠지 다음 잔부터는 쉽게 들어갔다. 그렇게 세 잔을 비우고, 네 잔을 비우자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것도 같았다. 동식이 네 잔을 비우는 동안 지훈의 첫 잔은 이제야 절반이 조금 안 되는 양이 남아 찰랑거리고 있었다. 전부 나보고 마시란 건가. 막막한 심정에 잠시 마시기를 멈추고 숨을 후 불고 있자니, 대화 없이 적막한 이 상황이 답답했는지 지훈이 말을 걸었다.
“어이, 육동식! 너 취했냐? 이거 딱 봐도 취했네.”
웃음기 가득한 지훈의 말에 동식은 다시금 제 앞에 놓인 술을 벌컥 들이켰다. 야, 그거 센 거다? 적당히 마셔! 걱정의 기색이 어린 것도 같은 지훈의 급한 말림도 무시했다. 걱정이 맞다 한들 정말 저를 위한 것은 아닐 터였으니까. 그저 빨리 취하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도수도 센 술을 얼마나 들이부었는지 쓰려오는 속을 애써 무시한 채로 동식은 테이블 위로 머리를 박았다. 취기가 가득한 상태라 그런 동식을 보던 지훈이 혀를 찼다. 그러게 뭐하러 그렇게 마셔서는. 한숨을 푹 쉬는 지훈에게 동식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무뉨... 이짜나요...”
“어, 말해. 육동식.”
취기에 발음이 줄줄 새는 발음에 허, 헛웃음을 지은 지훈이 짧게 답하자 동식이 끙끙대며 고개를 들어 지훈을 바라봤다. 동식과 지훈의 시선이 맞닿았다. 동식도, 지훈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동식의 눈에 점차 눈물이 어리기 시작하고, 그런 동식을 보던 지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잰 갑자기 왜 울어? 나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씨, 뭐야! 결국 지훈은 채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야, 육동식 너 갑자기 왜,...!”
“상무님, 저요... 너무... 너무 힘드러서... 차라리,... 죽고 싶어요......”
그런 지훈의 말을 끊고 동식이 비교적 정확해진 발음으로 말을 꺼냈다.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지훈의 귀에 꽂혀들어, 지훈은 멍하니 그런 동식을 응시했다. 대답 없는 지훈을 보던 동식의 시선이 점차 내려가 결국 이마와 테이블이 다시 맞닿았다.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전에도 한 번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아서. 그래서 무심코 꺼낸 말이었다. 결과적으로 동식은 그 말을 한 자신을 책망했다. 이미 했던 질문이라면, 대답도 이미 들었을 텐데. 그 대답도 결국 상처만을 남겼을 텐데. 왜 바보같이. 아니, 바보가 맞는지도 몰랐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곳에서 이렇게 있을 리도 없을 터였다. 저 침묵이 잠깐 원망스러웠지만 이내 다행이다 싶어졌다. 어떤 대답이든, 저 침묵보다 더 아프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동식이 완벽한 체념을 결심하고 있던 중에야, 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내가 같이 죽어줄까? 그거면 되냐?”
툭 던지듯 내뱉어진 말이었다. 순간적으로 동식의 몸이 경직됐다. 그런 동식이 반응에 무안한지 시선을 몇 차례 옮기던 지훈이 제 머리를 헝클었다.
“아이씨, 내가 뭐라냐. 못 들은 걸로 해라. 나 아무 말도 안했다. 야, 알겠지?”
지훈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동식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등받이에 등이 닿고 나서야 고개를 든 동식의 눈가가 붉었다. 지훈을 향한 시선이 배회하다 짧게 눈이 감기는 순간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저 사람을 놓지 못했던 이유가 이거였는지. 그렇게 모질고 상처를 줘도 이렇게 한 번씩 별 거 아닌 듯이 다정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라. 아무렇지 않게 같이 죽어주겠다, 제게 말해주는 사람이라.
......
정말 그런가?
이유 모를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두통과 어지러움에 동식은 신음을 낼 새도 없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감각과 이명이 동식을 괴롭혔다. 이명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분명히, 육동식. 자신의 목소리였다. 미약하게나마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야, 야아 너 또 왜 울어? 아 진짜! 넌 우는 게 주사야? 눈물이 남아나질 않겠네. 그만 좀 울어라, 어? ......야, 육동식. 육동식! 너 왜그래? 괜찬, 야!!”
동식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본 지훈은 짜증난다는 듯 동식을 보지도 않은 채 투덜거렸다. 원래 같았으면 죄송합니다, 한 마디라도 했을 동식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는 힐끔 쳐다보자 머리를 꽉 쥐고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식이 보였다. 당황해서는 급히 동식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픔에 허우적거리는 동식이 반응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급히 일어나 다가가려니 힘이 빠진 듯 비틀거리는 것이 또 영 불안해 결국 소리를 지르고는 동식을 붙잡았다. 딱 봐도 몸에 힘이 없는 상태에 힘을 실어 몸을 흔들지도 못하고 꽉 붙잡은 채로 지훈은 야, 정신 차려. 그러게 내가 술 좀 적당히 마시라니까...! 따위의 말 밖에 하지 못했다.
이명이 멈추고 아픔이 조금 가신 뒤에야 동식은 슬 눈을 떴다. 아까까지 취해있던 것이 장난인 것처럼 술기운은 모두 날아가고 난 뒤였다. 동식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지훈을 향했다. 모든 것이 기억난 것은 아니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상무님...”
“어, 왜! 너 진짜...! 아, 아니다. 됐다. 다 필요없고, 너 다음부터는 술 절대 마시지 마! 알았어?!”
“... 상무님. 왜 그러셨어요?”
“뭔 소리야. 내가 뭘 했는데?”
“지금도...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거예요, 저한테...?”
갈라진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건성건성 대답하고는 제 말만 이어가는 지훈을 앞에 두고, 동식도 지금 당장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떨리는 동식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훈이 입을 닫았다. 동식이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말없이 시선을 돌리는 지훈을 보던 동식이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됐잖아요. 그냥 다 말해주셨으면... 그랬으면 되는 거잖아요. 왜... 왜 저를 이렇게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요. 왜 제가 상무님한테, 왜 상무님이... 왜...... 이러면, 이럼 제가 또 제 탓을 하게 되잖아요... 또 제가, 제가아...”
“...됐어. 네 탓 아니야. 지금은... 딴 생각 말고 좀 쉬어.”
울먹이며 말하던 동식의 호읍이 가빠져오는 듯하자 지훈이 동식의 말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동식을 끌어안고 진정시키듯 등을 토닥였다. 동식의 호흡이 토닥이는 손길을 따라 점차 정상적인 궤도로 돌아왔다. 지훈의 등 건너 놓인 꽃병이 눈에 들어왔다. 병에 꽂힌 새하얀 꽃이 선명히 동식의 시야에 잡혔다. 일그러져있던 동식의 표정이 점차 펴지고, 천천히 눈이 감겼다. 아팠던 머리의 영향인지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로 서인우 이 개새, 하는 지훈의 욕설이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
똑똑, 경쾌한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확인도 않고 시선을 여전히 보고 있던 서류에 고정한 인우가 입을 열었다. 지금 이사실을 찾을 사람은 한 명 뿐이었으니까.
“왔어요, 조 팀장?”
“네, 이사님. 저 근데...”
“왜요. 육동식에 관련된 겁니까? 뭐 특별한 일이라도 있나? ...그건 뭐예요?”
뒷말을 흐리는 유진에 재촉하듯 질문을 던지며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유진을 보던 인우가 미간을 좁혔다. 유진이 들고 있는 꽃병을 발견한 탓이었다. 인우가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아는 유진이 일부러 꽃을 사왔을 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유진의 표정도 당황스러움을 담고 있는 것을 보면 저것을 들고온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인우는 유진을 응시하는 것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그런 인우의 시선에 유진은 인우에게 다가가 손에 들린 꽃병을 내밀었다.
“웬 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육동식이 이걸 이사님께 전해달라고 가져왔습니다.”
“육동식이?”
“네. 그리고... 그 옆에 서지훈 상무도 같이 있던데요.”
유진의 말을 들은 인우가 허, 웃음을 터뜨렸다. 서지훈과 육동식이 같이 있었다는 것부터 뜬금없이 제게 꽃을 줬다는 것까지 하나같이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내 이사실 창가에 놓여진 꽃병에 담긴 새하얀 꽃이 인우의 눈에 들어왔다. 예쁘게 만개한 설강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