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 내리는 밤의 찬가
W. 세라
“현세의 낮은 지나고
그대는 또다시 나의 것
나는 그대의 깊고 검은 눈을 본다
그리고 사랑과 행복 이외의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 노발리스, <밤의 찬가>
D
눈을 떴다.
어슴프레 비쳐드는 이른 햇살, 봄바람에 흐드러지는 레이스 커튼, 너른 품 속의 따사로운 온기. 깜박, 또 다시 깜빡. 노곤히 내리쬐는 잠기운에 가물한 눈꺼풀을 손등으로 부빗. 동식이 어젯밤의 여파로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낑낑거리며 쥐어짜냈다. 출근, 해야죠…. 다감한 팔베개의 주인을 향해. …지훈 씨. 그럴수록 도리어 양팔로 꽉 껴안아 버리고 마는 것은 또 무슨 청개구리 심보일까만은.
“……아이씨, 싫어…. 육동식, 나 오늘 출근 안해…….”
“…서지훈 사장님. 출근은 하셔야죠…. 그래야 직원들도 먹여살리고, 저도 먹여살리구…….”
“야, 어차피 나 이번달까지만 사장인데…. 한달 먼저 쉬면 되지. 어?”
“서 사장님, 권한 위임 절차 남았다면서요…. 땡땡이는 다음달부터 쳐요. 응?”
“육동식, 그럼 나 모닝 뽀뽀라도 해줘. 나 뽀뽀 안 해주면 안 일어난다?”
“…지훈 씨가 애예요?”
“어. 나 애야. 동식이 형보다 네 살이나 어리잖어. 에이, 그 정도면 어린애 해도 돼. 그치?”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진짜….”
막무가내식 티격태격에 절레절레 백기를 들면서도 웃을락 말락. 낮게 잠긴 음색으로 유치찬란 잠투정 부리는 지훈을 붙잡고서 쪽쪽쪽, 무자비한 입술 도장 공격 개시! 푸슬거리는 웃음 소리가 간지럽게 오고 가는 아침. 지훈과 동식이 콩 장난스레 이마를 맞부딪히고는 행복하게 웃었다.
D
1년, 식물인간으로 잠들어 있었던 시간.
어슴프레 비쳐드는 느지막한 햇살, 봄바람에 흐드러지는 하얀 커튼, 삭막한 의료용 설비와 번잡하게 연결된 선들. 깜박, 또 다시 깜빡. 나른히 내리쬐는 잠기운에 가물한 눈꺼풀을 손등으로 부빗. 동식이 왜인지 꽉 잠겨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낑낑거리며 쥐어짜냈다. 누구, 세요…? 툭. 남자의 품에서부터 꽃다발이 추락해 데구르르 발치를 굴렀다. ……육동식. 순백으로 피어난 행복의 은방울꽃이, 바닥을 데구르르.
육동식은 깨어난 게 기적이라고들 했다. 다만, 기적을 일으킨 댓가는 기억과의 등가교환. 그래도 뭐, 기억 없어지고 대신 일년만에 깨어났으니깐 다행이네. 동식은 어딘가 남일처럼 생각하며 물끄럼 병실의 문가를 응시했다. 기억이 없어서 그런가. 여즉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나 육동식이 누구이고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런 현실감이 극도로 옅은 탓일까. 삐끗 열린 틈새로 날아드는 단어의 조각들 또한 그닥 제 얘기 같지는 않더라만은. PTSD, 역행성 기억상실증, 추락, 편도체 손상, 자기방어기제, 트라우마, 도주, 서인우. …서인우? 모르는 이름이다. 누구지. 하긴 뭐, 가족들 이름도 며칠 전에야 알았는데. 모르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냐만은.
그 순간. 문에 붙은 유리창 너머로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서지훈. 깨어났을 때도 처음으로 마주쳤던 그 남자. 아무래도 제가 일어난 걸 모르고 있었던지 퍽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부랴부랴 문을 굳게 닫아걸고, 나에 대해 의논하던 담당의와 심보경이라던 여경에겐 황급히 눈치도 주고, 그러고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살기등등 날 세운 눈매를 잽싸게 누그러뜨리며 찡긋. 그 특유의 개구진 윙크가 제법 자상하다. 그래서 동식도 그냥, 눈치껏 척을 해주기로 했다. 모르는 척, 못들은 척, 못본 척. 알겠다는 의미로 찡긋, 부러 장난스레 윙크를 되돌려주었다. 서지훈이 웃었다.
J
육동식, 니가 내 애인이거든.
왜 저한테 잘해주세요? 육동식의 의구심 섞인 물음표에 주저 없는 마침표를 꾸욱. 한가로이 휠체어를 밀어주며 나간 오후의 산책길. 이름 모를 아름드리 나무 아래, 늦봄의 그늘이 드리운 동식의 표정 위 어째 영 심란한 그늘이 한겹 더 드리웠다. 야아, 내가 뭐 어때서…! 그에 욱한 지훈이 간만에 개 같은 성질머리 돋구며 사납게 으르렁.
‘…서지훈 씨랑, 제가요…?’
‘…야. 너 그 반응은 뭐냐, 존심 상하게. 내가 대한증권 상무, 아니지, 이젠 사장이라니깐? 나처럼 돈 많고 잘생기고 키도 크고 잘나가는 연하남이 니 애인이라는데. 안 기뻐? 육동식! 너 로또 맞은 거야, 로또! 로또 1등!’
‘아니이… 저는 사귄 기억도 없는데,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쫌, 난감해서요…….’
‘에이, 난감할 게 뭐 있다고 그래. 육동식, 이럴 때는 말이지. 우와~ 대박~ 유후~ 좋아하면 되는 거야. 오케이?’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첫 고백 치고는 양호하지. 암튼 내가 싫다는 건 아니잖아? 내심 티는 안 내도 거절을 당할새라 전전긍긍하던 지훈이 슬몃 마음을 놓았다. 괜스레 장난치듯 너스레를 떨며 농담조로 가볍게 과장하는 건 덤. 그럼에도 침울하게 내려앉은 그늘은 한층 그 깊이를 더해갈 뿐. 지훈, 씨는…. 들릴듯 말듯 새어나온 문장의 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기억상실증인데, 그래도, 괜찮아요……?’
‘그럼, 당연히 괜찮지. 난 육동식 니가 지렁이라고 해도 좋았을 거야. 지금처럼 고백도 했을 거고.’
‘지렁이? 근데 왜 지렁이에요…?’
‘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아냐? 지렁이거든.’
그래서, 또 다시 고백했다. 지금은 딱 그 정도가 적당하리라. 농담 같은 진심, 가벼운 듯 무거운, 장난스런 고백. 그제야 동식도 배싯 작게나마 웃음을 그린다. 덩달아 지훈도 한쪽 입꼬리를 픽 유쾌하게 말아올렸다. 이제야 좀 웃네, 육동식이. 하여튼, 쟤는 내 앞에선 잘 웃지도 않아요. 서인우랑 있을 땐 잘만 웃더니,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분이 급속도로 다운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과거의 상념들. 지훈은 말 못할 심란함에 쓰디쓴 한숨만 삼켜내고 말았다. 그 날, 그 빌딩, 그 추락. 도착하자마자 목도한 광경이 그 창가의 유리 파편처럼 눈에 박히던 찰나들. 서인우를 밀쳐내고 홀로 추락해가던 육동식과, 죽도록 비참한 얼굴로 돌아서던 서인우.
육동식에게 묻고 싶었다. 왜 그랬어? 육동식. 너는 왜, 서인우를…. 묻고 싶었다. 묻지 못했다. 육동식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육동식은 기억을 잃었고, 서인우는 행방을 감추었고, 그리고 나는. 서지훈이 굳게 말아 쥔 손바닥을 손톱 자국이 날 만치 꽈악, 세게 그러쥐었다. 나는, 나도, 육동식을 구하고 싶었다. 육동식이 나를 구해준 것처럼. 구하고 싶다. 구할 것이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꼭. 바람이 불었다. 마주보는 두 사람 사이로 햇빛과 그늘의 경계가 흐리게 선을 긋던, 어떤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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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은 한순간이었다.
멀어져만 가는 밤하늘, 살갗을 가르는 칼바람, 물거품이 되어 사그라드는 단말마. 이사님. 깨어진 유리창 너머 어른거리는 인영. 가세요, 얼른…. 저 멀리서부터 아득하게 가까워져 오는 사이렌. 무중력 비행의 끝은 다시, 중력으로. 꽝.
‘이사님! 이사님도 좋아하는 꽃 있으세요?’
‘꽃? 글쎄요. 딱히 선호하는 꽃 종류는 없긴 한데. 동식 씨는요?’
‘아, 저는 은방울꽃 좋아해요!’
아프다. 아픈가? 잘 모르겠다. 죽을 것처럼 아픈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죽어서 덜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적어도 온몸의 뼈와 장기와 내장이 싹 다 으스러진 감각이긴 했다. 아하하. 육동식이 웃었다. 이사님 말이 맞았어요. 간헐적으로 터지는 기침마다 몽글거리는 핏빛 물보라. 육동식은, 호구 새끼라고. 뒤도는 그림자 다음으론 내다보는 그림자. 서 이사님은 좋으시겠어요. 이것도 저것도 다 쉽잖아요. 나한테는, 너무… 어려운데.
‘은방울꽃?’
‘여기, 이 꽃이요! 방울처럼 생긴 것도 예쁜데, 뜻은 더 예뻐서 좋아해요.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다시 찾은 행복.’
육동식은 생각한다. 이 세상이 이분법 세상이라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좋아하는데 싫어하고, 싫어하면서도 벗어나질 못하고, 벗어나지 못해 원망하고, 원망하면서도 놓지를 못하고. 그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동식이 초점 잃은 눈동자를 흐리멍텅하게 깜박였다. 주마등이라고 해봤자 고작 그 정도. 아롱아롱 내리는 백색의 눈송이가 새하얀 은방울꽃을 닮아있다는, 그런 아무래도 좋을 감상 따위.
‘어? 이사님도 알고 계셨어요?’
‘그냥, 뭐… 얼핏 들은 기억은 나네요. 어머니가 꽃을 좋아하셔서.’
‘우와! 진짜요? 아, 그럼 서 이사님 어머님은 무슨 꽃을 제일,’
‘그런데 동식 씨. 벌써부터 우리 결혼 준비 하는 거예요? 나만 쏙 빼놓고?’
‘……네에? 그게 무슨,’
‘아니에요? 이 사진 아래의 문장을 보면. 또한 은방울꽃은, 웨딩 부케로도 사용되며 신부들이 선호하는 부케 중 하나….’
‘아, 아뇨…! 아니이,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그냥! 예, 예뻐서, 좋아해서, 보여드릴려구……!’
부, 부케, 그런 거, 아닌데…. 기어들어가는 개미 목소리. 농담이에요, 농담. 피식거리며 새나오는 미소. 아휴, 이사니임…! 저 좀, 그만 쫌 놀려요, 쪼옴…! 발개진 얼굴로 쿵쿵 발을 구르며 울컥. 그러다가도 하나로 겹쳐지는 두 개의 웃음소리. 정말, 사랑하고 싶지 않았는데……. 잦아드는 숨결, 눈밭을 물들이는 핏빛, 감기는 눈꺼풀. 육동식이 눈을 감았다. 암전. 그리고 모든 것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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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틀었다.
아침 뉴스의 특집 코너. <싸이코패스 살인마, 그들은 왜 살인을 저지르는가>. 여성 앵커와 남성 프로파일러 간에 진중하게 오고 가는 심도 깊은 인터뷰.
“…또한, 한동안 세간을 공포로 몰아넣은 토막 살인마. 이 역시도 범인은 싸이코패스인 것으로 밝혀졌는데요. 대외적으로는 대기업에서 이사로 근무하며 주위의 평판도 좋았던 터라 더욱 큰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죠. 이 경감님, 작년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지 않았나요?”
“네, 맞습니다. 포식자 살인마. 그 사건의 범인 역시 한 증권 회사의 이사로 주위 사람들의 평도 아주 좋았었죠. 또한 범인은 당시 교통사고로 기억 상실 상태였던 부하 직원에게 누명을 씌우기까지 했는데요. 그런 회피성의 책임 전가 역시, 이번 사건과도 유사한 패턴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렇다면 경감님은 그런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는 대부분 선천적으로 타고 나는 거라고 보시나요? 아니면 후천적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을까요?”
“뭐. 아무래도 이런 케이스는, 대개는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싸이코패스에 가깝다고 봐야겠죠. 주로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방치되며 내버려지는 애정 결핍 아동들의 성장환경에서 이런 사례가 여럿 보여지는데요. 그 예로 포식자 살인마였던 대한증권 이사 서인우 역시,”
확, 돌연 등 뒤에서부터 뻗어져 나온 손이 불시에 리모콘을 낚아챘다. 눈 깜짝할 사이 뉴스에서 만화로 돌아가버린 채널. 졸지에 리모콘도 시청권도 빼앗긴 동식이 영문 모를 눈동자만 꿈벅이며 갸우뚱 고개를 돌렸다. 소파 뒤의 지훈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며 애먼 엄지 손톱만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그가 몹시도 초조할 때면 나오는 버릇. 그러다가도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냉큼 손을 감추며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만 비식.
“…에이, 넌 뉴스 같은 걸 왜 보냐. 재미없게. 동식이 그거 말고 딴 거 봐, 딴 거. 어? 재밌는 거 봐야지.”
“아니이… 근데, 어차피 지훈 씨는 출근할 거면서 왜,”
“야, 너는 요양하면서 몸과 마음을 푹 쉬게 해줘도 모자랄 판에, 골치 아픈 뉴스나 보면. 그게 힐링이 돼? 사람이 이런 걸 봐줘야, 이게 진정한 힐링이지. 그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걸 보면서 힐링하는 것도 쫌,”
“뭐? 너 지금 짱구는 못말려 무시해? 잘 좀 봐봐. 저기 저, 짱구의 순수함과 아이들의 우정과 화목한 가족애가 안 보여?”
“글쎄요. 엄마랑 아빠가 부부싸움 하는 건 잘 보이는데, 다른 건 잘….”
“…아, 그럼 뭐, 정 보기 싫음 이거나 보던가. 너 어디로 가고 싶은지나 생각해보라고. 내가 너, 육동식이 세계 일주도 시켜줄 수 있으니깐. 알았지? 나 올 때까지 얌전히 그거나 보고 있어. 오케이? 오구오구, 아이구 이쁘다, 우리 쪼푸~”
대뜸 품에 안겨 준 세계 지도에 이어, 답싹 양볼을 감싸쥐곤 무차별 뽀뽀 세례 쪽쪽쪽. 아이, 고만 쫌 해요, 이 서책바가지야…! 하도 양뺨을 꾸깃꾸깃 꾸기는 통에 댓발 튀어나온 오리 입술로 동식이 눈도 못 뜨고 끼이잉. 아주 사람 정신을 쏙 빼놓고는 복슬거리는 머리칼 짓궂게 헤집어놓고 도망. 맞다, 참. 오늘 저녁 외식은 뭘로 할지도 생각해보고. 알겠지? 그럼 나 진짜 간다. 저녁에 봐, 형.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 능청스레 바이바이 손인사. 철컥, 잠기는 철문 너머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그레이 수트. 하여간 못 말리겠다며 동식도 푸스스,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이 작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오늘따라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웬일로 형 소리를 다 해주는 걸 보면. 아니면 그냥, 기분 좋은 척 하는 건가.
동식이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새집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채널을 돌렸다. 아이, 벌써 다 끝났네. 서인우 얘기 더 듣고 싶었는데. 다시보기를 하면 되겠지만서도 어차피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일 터. VOD 대신 제 손등을 반절 넘게 덮는 소맷자락으로 꼬물거리며 검색. ‘서인우’. 이름 세 글자만 쳐도 포식자 살인마 사건부터 부하직원 육동식과의 스토리에 신상정보까지 쫘라락. 동식이 채도 낮은 숨을 싱숭생숭 내쉬었다. 서지훈은 요양이라면서 집에만 가둬두고, 나 혼자서는 밖으로도 못 나가게 금지하고, 사장직을 내려두면서까지 단 둘이 해외로 떠나려고만 하고. 그럼 뭘 해. 병원에서 이름을 들었는데. 품이 큰 지훈의 셔츠 아래, 훤히 드러난 무릎 사이로 고개를 푹 처박으며 동식은 그 이름 세 글자를 조그맣게 되뇌어 보았다. 서인우.
만나고 싶었다. 묻고 싶었다. 저한테 왜 그러셨어요? 다만 별다른 분노나 원망은 들지 않았다. 뭐라도 기억을 해야 싫어하든 미워하든 뭘 할 텐데, 정작 그 서인우에 대해 단 하나도 기억나는 게 없었으니. 검색 결과만 놓고 보면 천하의 개새끼, 인간 쓰레기, 악마보다 더한 싸이코패스. 그걸로도 모자라 기억 상실에 걸린 불쌍한 말단 직원, 나 육동식에게 누명을 씌우고 이용하고 죽이려 든 악랄한 연쇄 살인마. 그런데도 나는 왜, 서인우가 보고 싶은 걸까. 참 이상도 하지. 보통은 무의식 중에라도 무서워하거나 증오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전자야 뭐, 뇌의 편도체 부위 손상으로 인한 무서움과 두려움을 비롯 공포심의 부재 어쩌고 저쩌고로 겁대가리를 상실했다 쳐도. 후자는 증오하지 않는 것보다는 증오하는 게 그럴싸할 텐데 그럴싸하지 않다는 것. 왜 이름만 들어도 아프고, 사진을 본 것만으로 먹먹하고, 서인우를 생각하면 울고 싶어지는 건지. 그래서 육동식은 결심했다. 그의 동생인 서지훈을 거리낌 없이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만나야겠다고, 서인우를.
띠링, 때맞춰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폰. 동식은 무언가를 예감한 듯 폰을 집어들어 반짝이는 액정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떤 날은 모르는 번호, 어느 날은 수신자 번호 제한, 언제는 공중 전화. 며칠 간격을 두고서 혹은 여러달이 지나서야 걸려오던 신원 미상의 전화들. 여보세요? 물어도 뚜뚜뚜. 누구세요? 질문해도 뚝. 장난 전화의 연속에 지훈에게 힝구 고민을 털어놓았던 게 지난해 겨울. 대번에 안색이 확 굳어서는 번호를 변경하고 경비를 강화하고 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것도 그즈음의 일. 그로부터 해가 바뀌고 첫 수신된 봄 전화. 동식이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이제는, 장난 전화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상대가 내게서 무슨 말을 듣기를 원하는 건지도.
“서인우 씨.”
- …….
“우리 만날래요?”
입술 끝으로 흘러나온 어조가 퍽 소담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라거나 오늘은 뭐 먹을래요? 같은 안부와 일상 따위를 소소하게 건네듯. 그래요, 동식 씨. 서인우가 웃었다. 처음으로 듣게 된 싸이코패스 살인마의 웃음 소리가 제법, 자상했다. 봄에 어울릴 정도로.
D
[지훈 씨, 나 산책 좀 다녀올게요]
[아 참, 충전 깜박하는 바람에 전원 꺼질 수도 있어요]
[퇴근 시간에 맞춰서 돌아올 테니까 걱정 말고]
[p.s. 비밀번호 너무 쉬운 거 아니에요?]
[p.s... 오늘 저녁은 삼겹살 콜!]
오늘의 착장은 아이보리색 롱니트 가디건과 물 빠진 연청바지에 백색의 스니커즈. 위치추적 되는 휴대폰은 종료. 현관문 내부 도어락 비밀번호는 저번에 몰래 훔쳐 본 덕택에 클리어. 24시간 상주하는 감시원들이 교대하는 틈을 노려 줄행랑. CCTV로는 행방을 유추하기 어렵게끔 유동인구 많고 목적지도 가지각색인 지하철 역 방향으로 이동.
모처럼의 외출에 동식의 발걸음이 유독 가벼웠다. 메시지도 넣어뒀고, 저녁 전까지만 돌아가면 되고, 서인우에겐 궁금한 거 몇개만 좀 물어보고…. 길목의 감시 카메라를 피해 인적 드문 골목으로 들어온 동식의 입을 덥썩, 불시에 틀어막는 하얀 손수건. 등 뒤에서부터 불쑥 뻗어져 나온 잿빛 광택의 가죽 장갑. 핑글, 뒤집어지는 시야. 그 남자, 아마도 서인우의 일견 자상한 구석이 있는 비웃음. 와, 역시, 싸이코패스 살인마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위기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감탄 어린 감상 한줄평을 끝으로 까무룩, 암전.
반짝, 다시 눈을 뜬 건 카시트 위. 일체 흔들림이 없는 부드러운 주행. 데굴 눈동자를 굴려보면 곁에는 핸들을 잡고서 전방을 직시하는 유려한 옆얼굴. 그제야 색색 어깨를 꾸긴 채 잠들어 있던 곳이 조수석이라는 걸 자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질 않아서. 축 늘어진 팔다리를 비롯해 온몸에 에너지가 싹 다 고갈되어버린 무기력한 감각. 저기요오…. 끼잉거리며 가까스로 쥐어짜낸 맥을 못추는 SOS. 일어났어요, 동식 씨? 피식 눈짓하며 되돌아오는 음색이 조곤조곤 다감해서 귀호강하기엔 좋았다. SOS에 응해줄지는, 글쎄올시다, 그건 아니지만서도.
“괜히 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동식 씨. 무리해서 움직이면 몸만 다치니까. 쓸데없이 반항하지 말고.”
“…저 지금,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왜요. 무서워요? 내가 동식 씨 죽일까봐.”
“아뇨, 무섭지는 않은데…. 아, 제가 그, 머리를 쫌 다쳐가지구. 공포를 못 느끼거든요. 한 마디로 맛이 간 거죠, 뭐. 겁대가리도 상실하고, 납치될지도 모른단 위기감도 없구, 서인우 씨도 하나도 안 무섭고…….”
“…안 무서워요, 내가? 기억도 안 나고?”
“그렇다니깐요. 무섭지도 않고, 기억도 안 나구… 어어? 근데요, 서인우 씨. 이렇게 대낮부터 막 돌아다녀도 돼요? 잡힐 거 같은데…….”
“나 걱정해주는 거예요, 동식 씨? 염려 말아요. 경찰 쪽에서도 수사 종료했고. 조만간 브리핑이랑 기사 나갈 거예요. 죽은 걸로 위장한 게 잘 먹힌 모양이던데. 뭐, 그쪽은 워낙 조사를 날림으로 대충 하니까. 동식 씨 때도 그렇고.”
그리고 지금은 밤이에요, 동식 씨. 그의 여상한 말마따나 스러져가는 풍경은 거무죽죽 재투성이. 그러네, 진짜 밤이구나. 창문 선팅된 줄 알았는데…. 이런 순간조차 망가져버린 머리로는 플러스 마이너스 위기감지능력 제로. 어수룩하게 양쪽 주머니를 뒤적거려본다. 스르르 손 끝에 딸려 나오는 건 소량의 먼지 정도. 하긴, 납치 하면서 휴대폰 안 뺏는 것도 좀. 그렇긴 하지. 그런 건 악당답지 않으니까. 이게 내 일인데도 머나먼 남일처럼 느껴지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
기억을 잃은 육동식은 여전히, 육동식이 좀… 어렵다. 육동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쉽사리 발을 붙이지 못해 나 홀로 붕 뜬 부유감. 일년이나 됐으면 그럭저럭 적응이 될 법도 하건만. 세상은 나보고 육동식이라는데, 정작 그 육동식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아이러니. 그래서 알고 싶었다. 서지훈을, 그리고 서인우를. 하다못해 살 부대끼며 살아온 가족들 이름도 육동식 본인 이름 석 자도 낯설은 가운데, 유이하게 낯섦 없던 이름 두 개. 서인우, 서지훈. 그들에 대해 차차 알아가다 보면, 나에 대한 것도 차츰 알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 동식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상대를 곧게 응시했다. 무성한 숲 속으로 차를 몰며 이따금씩 돌아봐주는 눈매가 퍽 스윗하게 누그러져 달달했다. 좋은 사람이라고, 오해하고 싶을 만큼.
“서인우 씨.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그 질문에 내가 대답해주면, 동식 씨는 나한테 뭐 해줄 건데요?”
“어어… 글쎄요. 뭐, 서인우 씨가 원하는 거 아무거나?”
“…진짜 겁 없네요, 동식 씨.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에이, 그니까 말했잖아요. 저 겁대가리 상실했다고…. 그냥, 애가 머리를 다쳐가지구 약간 쫌, 돌았다고 생각해요. 원래 미친놈들이 눈에 뵈는 게 없다잖아요. 서인우 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안 그래요?”
“……후회할 텐데, 피식자 씨. 난 한번 마음에 든 사냥감은 놓치는 법이 없거든.”
“후회 안 해요, 포식자 살인마 씨. 어차피 지금도 잡혔는데 뭘. 그럼, 저 질문해도 되는 거죠?”
“그래요. 대답해 줄 테니 질문해봐요, 동식 씨.”
끼익, 멈추는 브레이크. 제자리 풍경. 사냥 직전의 맹수가 여유로이 내려다보듯 일견 흥미롭게 훑어내리는 검고 깊은 눈동자. 어쩌면 목숨을 건 도박, 처음이자 마지막일 기회. 동식이 올곧게 그 눈빛을 받아내며 한숨처럼 물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I
“저는요, 서인우 씨. 그냥, 그냥 다 이상해요…. 내가 육동식인 것도 이상하고,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이상하고, 서지훈이 당신 동생인 것도 이상하고,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은 것도 이상하고…….”
“…….”
“그런데, 가장 이상한 게 뭔지 알아요? 내가, 서인우 씨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미워해야 하는데, 싫어해야 되는데, 그게 정상인데… 그게 안돼. 이러면 비정상이잖아. 그쵸. 나 진짜로 머리가, 망가졌나 봐요. 이상해, 이상해졌어, 내가…. 서인우 씨, 제발, 나 좀 어떻게 해줘요. 응? 대답해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대체 왜, 도대체 왜……!”
필사적으로 악 쓰는 악다구니, 꽈아악 붙든 셔츠자락에 매달려 오는 손의 떨림, 후두둑 쏟아져 내리는 눈물방울. 망가진 육동식. 그걸 보며 서인우는 인지한다. 망가진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도 마찬가지예요, 동식 씨. 내가 이상해졌어. 육동식 때문에. 들릴듯 말듯 토해낸 답이 어지러이 침잠하는 밤.
서인우는, 육동식이 어렵다. 이것도 저것도 다 쉬웠는데. 하다못해 살인을 은닉하고, 좋은 사람인 체 연기하고, 죽음을 가장해 추적을 따돌리기도 쉬웠는데. 육동식은… 모르겠다. 처음은 나와 같은 동류라는 생각에 내가 ‘우리’ 가 된다는 기대감만으로 벅찼고, 그랬는데 나보다 더한 싸이코패스라는 생각에 내 적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했고, 그 다음으론 호구 주제에 감히 나를 속였다는 생각에 들끓는 배신감이 몰려왔고. 기실 육동식은 단 한번도 내게 자신이 싸이코패스 살인마라고는 밝힌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기대하고, 일방적으로 착각하고, 제멋대로 실망한 건 내 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건 육동식 때문이므로 육동식을 없애버려야만 한다는 맹목적인 분노에 치닫고 만 것은. 육동식 한정 불쑥불쑥 고개를 쳐드는 이상한 감정들의 정체를, 나로서는 알 길이 없어서.
서 이사님! 해사하게 만발하는 웃음을 볼 때면. 서 이사님. 말간 목소리로 종알거리는 걸 들을 때면. 서 이사님…. 헐떡이는 신음 소리를 깔아뭉갤 때면. …서 이사님! 민망함에 동동거리는 반응을 접할 때면. ……인우 씨. 주저하던 끝에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준 그 날, 돌아보자 배시시 단풍잎 물 든 얼굴로 간지럽게 웃던 그 날의 육동식.
생전 처음 가져보는 생소한 감정과 거북한 기분의 연속. 알고 싶고, 눈길이 가고, 간질거리고, 신경이 쓰이고, 일희일비하고, 거슬리고, 초조하고, 집착하고, 가지고 싶고, 충동적이 되어가고, 자제력을 잃어가고, 감정적으로 변해가고, 계획이 틀어지고, 약점이 되어버리고, 내가 나답지 않게 무너져 간다는 것. 결국 육동식을 없애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모르는 건 제거하고, 이상한 건 치워버리고,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려야만 하는 삶을 악착같이 버텨냈으므로. 이번에도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짓밟고 가지고 놀고 무너뜨렸는데도 불구하고. 육동식은 왜, 나를, …….
“…동식 씨.”
“…….”
“……왜, 날 구한 거예요?”
말했잖아요, 내가. 한번 마음에 든 사냥감은, 두번은 안 놓친다고. 그르렁거리는 어조가 경고하듯 사납게 속삭인다. 충동적으로 와락, 으스러질 것처럼 끌어안자 양팔에 가둔 몸이 움찔 튀었다. 갓 태어난 새끼 짐승마냥 약기운에 몸도 못 가누는 게 낑낑거리며 바르작거리는 꼴이 참, 같잖게도 사랑스러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으적거리며 황홀하게 잡아먹어버리고 싶게끔.
실은 만나러 오는 내내 고민했다. 죽일까, 살릴까. 저를 이용하는 것도 모르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던 희생양. 나를 잡아당기는 대신 와락 밀쳐내고 홀로 추락해가던 피식자. 은방울꽃을 좋아하던, 내 어머니를 닮아있는 육동식. 행복을 꿈꾸고, 미련하고, 세상 물정 모르고, 사람 잘 믿고, 원망할 줄도 모르고, 착해빠지고, 한심하고, 나약하기 짝이 없고, 그토록 여리고, 다정한… 내 어머니. 그리고 육동식. 그래서 더 싫었다. 자꾸만 내게서 비참하게도 버려진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니까. 죽이고 싶을 만큼 싫은데도, 그런데도 죽이지 못했다. 죽일 수 없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사랑을 해 본 적도 받아본 지도 너무 오래여서. 서인우가 자조하듯 조소하며 꽈악, 힘을 실어 육동식을 도망 못 치도록 제 품에 가두었다. 정말, 사랑하고 싶지 않았는데…….
“…동식 씨, 아까 나한테 그랬죠. 내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다고.”
“…….”
“내가 원하는 건, 동식 씨가 내 질문에 대답해주는 거예요. 왜, 나를 구한 건지에 대하여.”
“…그럼, 서인우 씨도 대답해요. 나한테 왜 그랬는지.”
“동식 씨가 먼저 대답하면, 나도 대답해 줄게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저는, 기억도 없는데…….”
“그럼 뭐, 동식 씨 기억이 돌아올 때까진 나랑 같이 있어야겠네. 서로 대답 들으려면. 안 그래요?”
“…제가, 싫다고 하면요…?”
“싫으면 지금이라도 도망쳐요. 이번이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까.”
“……저 도망 못 가게 꽉 안고 있으면서, 몸에 힘도 안 들어가는데, 어떻게 도망을 쳐요…….”
제 아무리 끼잉거리며 밀어내봤자 하등 보잘것 없는 발버둥. 그마저도 흡족한 유희거리로 전락한 찰나. …지훈 씨한테, 돌아간다고, 약속도 했는데……. 바둥거리며 약하게 흘러나온 혼잣말은 퍽 불쾌한 것이었다. ……동식 씨가 사랑하는 건 난데. 왜 그 새끼한테 돌아간다 그래요. 확 그놈 죽이고 싶게. 착 가라앉은 어조로 싸늘히 뇌까리며 아까에 이어 한번 더, 푸욱. 뒷목에 깊숙이 주사기를 꽂아넣자 바르르, 발작하듯이 잘게 떨던 몸도 오롯이 제 품으로 무너져 내렸다.
“난 상관 안해요, 동식 씨. 기억을 못하든, 머리가 망가졌든, 날 사랑하지 않던 간에. 이젠 내가 동식 씨를 사랑하니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요, 우리. 스러진 육동식에게 닿지 못하는 비틀린 사랑의 찬가. 비로소 은방울꽃도, 육동식도, 완벽하게 망가져 제 손 안으로 떨어져 내린 밤. 틀림없이 행복해집니다. 그보다 마음에 찬 꽃말은, 다시 찾은 행복. 서인우가 행복하게 웃었다. 두 인영을 태운 차가 쩌억 아가리를 벌린 어둠 속으로 집어삼켜지듯 완벽히, 녹아들었다. 암전. 그리고 모든 것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