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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그리고 안녕
W. 불

‘동식 씨!’ 

‘인우 씨, 왔어요?’ 

‘네, 동식 씨가 좋아하는 꽃 들고 왔어요.’ 

‘고마워요, 힘들었죠.' 

'네, 힘들었어요.' 

'너무 수고했어요.’ 

‘보고 싶었어요.’ 

둘은 눈물을 흘리며 부서질 듯이 껴안았다. 이제는 언제든 으스러져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 1. 꽃이 지는 시간 

"음..조금 더 줘야 할까요?" 

"아냐, 그 정도면 된 것 같은데요?" 

"그렇죠. 흠, 너무 많이 주면 썩으니까." 

"그래요. 그나저나 요즘따라 꽃을 어디서 그렇게 가져와요." 

"아.. 원래 좋아했어요." 

"그으래~?" 

"네, 향기롭고 예쁘잖아요." 

"흠, 흠. 뭐 연애.. 하는 건 아니고?" 

"네에~??" 

"요즘 얼굴색도 좋아지고~" 

"에이이, 그건 팀장님 착각이에요." 

"진짜 착각 맞아?" 

"아유, 제가 일 해야지 사랑놀음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뭐야아. 진짜로 연애 안 하는 거야?" 

"네. 그럼요. 제가 설마 거짓말하겠어요?" 

"에이, 아니지~동식 씨야 뭐 거짓말 안 하니까!" 

죄송해요. 이번에 한 번 했어요. 동식은 속내를 숨긴 채 웃어 보였다. 요즘 기분이며 얼굴빛까지 전부 행복해 보이고 좋아진 건 사실이었다. 퇴근을 하고 나면 꼭 들려야 하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제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있었으니까.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더 좋아진다. 

동식은 평소처럼 시계를 몰래 힐끔힐끔 바라보며 퇴근 타이밍을 잡았다. 6시가 되려면 앞으로 5초. 재빠르게 컴퓨터를 끄고 짐을 챙겨서 나갈 생각이었다. 방해하는 사람이 없다면 말이다. 

좋아, 지금이다.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동식 선배 벌써 가요? " 

"으응, 바쁜 일이 좀 생겨서." 

"동식 씨 애인 보러 가?" 

"네. 퇴근할 때 들려.. 야.." 

아.. 꼼짝없이 말려버렸다. 동식은 순간 두뇌가 기능을 멈춘 듯 한 느낌이 들어 눈만 꿈벅거렸다. 모든 시선이 저를 향해있었다. 

"맞네 애인!" 

"아..하하..네." 

맞아요, 애인. 사랑하는 사람 보러 가는 길. 동식은 조용해진 자리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가 보겠습니다.. 하곤 급하게 총총 걸어 나온다. 으으, 민망해라. 그래도 인우를 볼 생각하니 기분은 좋다. 

*

동식은 언젠가부터 꽃을 좋아하게 되었다. 단순한 미 만이 아닌 그 꽃말과 이야기들까지. 그리고 그 시작은 인우를 만나고부터였다. 

둘의 첫 만남은 이러했다. 

그 당시 동식은 친구의 대학교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미리 주문 해 두었던 꽃을 찾으러 근처 꽃집을 갔었다. 자신이 직접 골랐던 꽃이기에 더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었는데.. 

[폐업] 

아니, 이게 무슨..?! 

왜인지 가려고 했던 꽃집이 아예 문을 닫았었다. 미리 결제를 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열심히 고른 꽃인데.. 친구 졸업식 시간은 다 되어가고 꼭 가지러 가기로 한 꽃은 이미 소멸되어(??) 버렸고. 

동네 꽃집이라곤 여기 하나뿐인데. 동식은 주책맞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육동식. 정신 바짝 차려! 겨우 이런 걸로 눈물을 흘리는 게 이상해서 꾹 참고 주변에 꽃집이 없는지 검색을 하기로 했다. 

꽃집 검색을 하니, 가장 가까운 곳이 걸어서 20분이다. 친구 졸업식은 10분 남짓 남았는데 어떡하지. 딱 꽃을 살 돈과 버스비 밖에 가져오지 않아서 택시를 탈 수는 없었다. 그 생각을 하니 또 울먹울먹 눈물이 찬다. 

"이씨잉.." 

훌쩍훌쩍. 결국 눈물을 흘리는 동식이다. 어떡하지 밖에 생각이 안 나서 더 눈물이 났다. 꽃을 정말 좋아하는 친구라 기대를 많이 하고 있을 텐데. 동식은 속상한 마음에 바닥을 보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걷고 있었다. 

"아!" 

"..!" 

그렇게 건물들을 지나던 중, 누군가가 둔탁한 몸으로 제 어깨를 퍽 치는 게 느껴졌다. 상대가 달려오고 있던 탓에 꽤 세게 부딪혀 어깨가 아팠고, 게다가 발이 꼬여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버렸다. 동식이 앞을 보고 걷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상대가 앞을 제대로 보지 않은 이유도 있었겠지. 동식은 안 그래도 서러운데, 갑자기 울컥 더 눈물이 솟아 그대로 엉엉 울어버렸다.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흐어어엉, 흐으.."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흐끅,” 

“일으켜 드릴게요." 

그는 아예 몸에 힘을 풀어버린 동식을 낑낑대며 일으켜 세웠다. 까진 손바닥과 무릎이 아려와 더 뿌엥 우는 동식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그. 상황이 제법 귀엽기도, 웃기기도 했다. 

"아포호.. 흑, " 

"죄송해요, " 

"흐으잉.."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아푸다.." 

"간단한 응급처치라도 하실래요?" 

"호오, 호... 녜에?" 

"그대로 두면 상처 덧나요. 이 근처에 가게 있으니까.." 

"어어, 근데 저 지금 늦었는데.." 

"가는 곳 까진 차로 태워다 드릴게요." 

동식은 차로 태워준다는 그의 말에 솔깃해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꽃다발은.. 직접 만든 꽃이 아니라 아쉽지만, 학교 앞에서도 파니까 거기서 사면 될 것 같고. 조금 늦을 것 같긴 하지만 걸어가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 마음이 아예 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는 동식이다. 

그는 길을 살짝 틀었다. 그리고는 뭐가 신이 났는지 몸을 흔들거리고 있다. 동식은 살짝 낌새가 이상했지만, 운전하는 사람이 무섭게 생겨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씨, 나 잘 갈 수 있겠지..? 생각보다 조심히 달리는 차는 동식이 많이 다닌 적 없던 길을 지났고, 그 목적지는.. 

"내리세요." 

"네? 네.." 

꽃집...? 

동식은 금세 속으로 인우에 대한 경계를 풀었다. 자세히 보면 무서운 얼굴인 사람이 안 어울리게 꽃집을 하다니. 왜지? 동식은 구시대적인 발상을 하면서도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우는 저도 모르게 궁금한 표정을 한 동식이 귀여웠는지 살금 웃는다. 그리고 문을 열면, 서정적인 느낌의 예쁜 꽃들이 보인다. 

우와.. 꽃이 너무 아름다운 탓에 동식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꽃 예쁘죠. 인우는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구급상자를 찾아 돌아다니며 동식에게 말했다. 

"여기가 아까 말한 가게예요?" 

"네. 제 가게예요." 

"헐, 그게 꽃집일 줄이야.." 

인우는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지, 아니면 동식의 예상 못 했다는 그 말투가 웃겼던 건지 짧게 웃기만 한다. 그러면서도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금세 찾아온 구급상자를 열었다. 

그럼 저..지금 꽃다발 하나만 해 주실 수 있나요? 

멈칫. 소독약과 연고를 꺼내려고 했는데, 막상 먼저 꺼내진 건 동식의 말이었다. 동식은 말을 뱉어놓고도 아차! 싶은 마음에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인우는 소독약으로 까진 동식의 손을 조심히 소독하기 시작하며 묻는다. 

 

 

 

"꽃다발은 왜요?" 

 

"아, 그게...오늘 친구 졸업식이라 집 앞 꽃집에서 미리 하고 싶은 꽃 골라서 그걸로 해 달라고 했었는데, " 

"네." 

"...폐업했어요, 갑자기요. 기대했었는데.."

 

 

 

동식은 처연한 눈빛으로 제 손목을 붙잡은 인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시선을 느낀 인우 역시 동식과 눈을 마주친다. 이상하게 눈을 피해야 할 것 같은데 피해지지가 않아서 둘은 몇 초 동안 눈을 마주친다. 

"손님들이 주문했던 꽃다발 있는데, 급하면 일단 드릴게요. 다시 만드는 거 금방이니까." 

인우는 끝까지 눈을 피하지 않고 이야기했다. 동식은 그 얼굴을 보며 말을 듣고 있자니 괜히 죄라도 진 기분이 들었지만, 친구와 꽃을 약속했기에 내팽개칠 수가 없었다. 졸업식 시작 시간은 이미 4분이나 지나있었고, 꽃다발을 지금 만들게 하는 것도 실례고 나도 더 늦고. 

"일단 다친 곳 치료 좀 하고 계세요.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네.." 

당시 동식은 뒤 돌아 걷는 인우를 보며 이렇게 착한 사람한테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깊게 고민했더란다. 어떻게 보면 바닥 보고 걸었던 제 잘못이 컸는데도 화 하나 내지 않고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이라니. 미안한 마음까지 들게 만들었다. 동식이 바라보는 인우의 첫인상은 그랬다. 멋있으면서 착한 사람. 무섭게 생겼지만(...) 다정한 사람. 

손과 무릎을 다 치료해 놓았을 땐 제 앞에서 꽃다발 두 개를 든 인우가 눈에 들어왔다. 연붉은 색의 장미와 흰 안개꽃, 초록색의 잎이 있는 다발. 그리고 온전히 프리지아로 가득 차 있는 꽃다발. 인우는 두 다발을 동식에게 내밀며 물었다. 어떤 게 더 마음에 들어요? 

아무래도 프리지아가 좋겠지? 꽃말이 새로운 시작이니까. 동식은 고민하는 척하더니 말없이 손가락으로 프리지아 꽃다발을 가리켰다. 그리고 건네받은 꽃다발. 

“얼른 가요, 더 늦겠어요.” 

“네..?” 

“일어나요.” 

“아잇, 저 돈은..” 

꽃을 건네받자마자 동식은 곧바로 차로 끌려간다. 오늘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야 진짜.. 생각한 동식이 돈은 어쩌냐며 계속 어물거리자 인우는 오히려 제가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손을 잡고 이끌더란다. 생각보다 그 힘이 억세 그대로 끌려간 동식은 당황해 입을 뻐끔거리기만 한다. 게다가 한마디의 말도 없이 차에 저를 태워 학교로 달리는 건 더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내리기 전에 전화번호 좀 줄래요?” 

학교에 거의 도착해 건넨 말. 동식은 갑자기 훅 들어오는 인우에 아닌 걸 알면서도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 남모르게 차가운 손등으로 얼굴을 식혔다. 전화번호를 찍으면서도 동식을 당황하게끔 하는 인우의 말은 쉴 줄 몰랐다. 

“꼭 연락해요, 돈 받는 것 대신 자주 만나요.” 

이랬던 둘의 첫 만남은, 서로가 느끼기에 특별한 인연이었다. 길 가다 부딪힌 사람이 가게에서 내가 찾고 있던 걸 갖고 있고, 게다가 그걸 주며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게 쉬운 일일까? 인우가 동식의 전화번호를 받아낸 것도 그 이유였다. 뭔가 가벼울 것 같지 않은 인연이라서. 

그리고 인우의 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동식이 그 날 감사했다며 한 번 찾아오고, 언제든지 오라는 인우의 말에 또 한 번 오고. 한 번은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네 번이 되어갔다.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더 친해졌을 땐 인우의 집에서 자기도 했다. 

그러다 사귀게 된 날은 둘이서 술을 마시기로 해 만난 날이었다. 동식이 차에 탈 때부터 긴장한 게 눈에 지나치게 띄어 인우는 계속 그를 힐끔댔었다. 동식은 자기 딴에 마음을 꽁꽁 숨겨왔다고 생각했겠지만, 이미 속 마음을 볼 대로 다 본 인우는 그게 귀여웠다.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한 것도 동식이었으니 아마 고백을 하려고 저를 부른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식은 고백은커녕 애꿎은 술만 계속 마셨다. 인우는 제 생각이 빗나간 건가 싶어 동식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몇 분 동안 인우가 관찰한 동식은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힘들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사람을 갖고 괜한 생각을 했나.. 

"이누 씨.." 

"네, 동식 씨." 

"저 사실 인우 씨 조와해요.." 

"네?" 

"그 말하려고.." 

인우의 얼굴에 쓰여 있었던 미안함은 곧 당황으로 물들어간다. 무언가가 숨통을 옥죄여오는 기분이 들었지만, 인우는 행복하기만 했다. 그 무언가는 바로 설렘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너는 첫 만남처럼 오늘도 예고 없이 찾아오는구나. 인우는 느꼈다. 고백이라고 예상은 했다만 이렇게 훅 들어올 줄은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었다. 인우는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더듬는다. 

“어.. 그게,” 

“흐엉, 이럴 줄 알았어..” 

“네?” 

“이누 씨는.. 나한테 마음 없는 거조.. 푸우,” 

“아니요, 아니에요! 저도 동식 씨 좋아해요. 근데,” 

“근데?! 근데, 근데면.. 나랑 사귀기 싫은 거구나..” 

“아니? 아니에요, 동식 씨가 저한테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거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어..? 짓짜여..?” 

“그럼요. 근데 갑자기 그렇게 좋아한다고 말할 줄 몰랐어서..” 

“...” 

“숨이 멎을 뻔했어요, 정말." 

“나는 얼마나... 긴장했다고요, 인우 씨 좋아한다느은.. 그 말이, " 

“네." 

“그 마리이! 맨 정신으로, 안 나올 것 같았어요..” 

괜찮아요, 전 어떻게 고백했어도 다 받았을 거예요. 지금 제가 동식 씨 좋아하게 된 이상 동식 씨가 뭘 하든 다 좋아요. 동식은 그 이야기를 듣고 인우에게 폭 안겼다. 저 힘들었어요.. 꽤나 마음앓이를 했는지 아이처럼 투정 부리듯 제게 말하는데, 괜히 마음이 아파 인우는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제가 먼저 이야기할걸 그랬어요. 

“아니야..내가 고백하고 싶었어요.” 

“왜요?” 

“조와 하니까아.. 내가..” 

그 말이 인우에게는 무언가 확 오는 말이었다. 이렇게 단순한 사람인데, 이상하게 말 한마디가 저에게 자꾸만 깨달음을 안겨주는 게 그냥 끊어질 인연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주는 것 같았다. 좋아한다는 말이 널 지금부터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로 들렸다. 그런 말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동식 씨 지금 이러는데 어떻게 날 책임져요.” 

“...” 

“책임지는 건 제가 해요, 그러니까 동식 씨는 저만 따라와 줘요.” 

그렇게 그 날을 기점으로 시작한 두 사람의 연애. 

둘의 연애는 유독 행복했다. 보고 있는 사람들 입에서 '그만 좀 해!'가 아닌 '더 해봐.'가 나올 만큼 잘 어울렸고, 성격이며 식성, 좋아하는 것 까지 안 맞는 게 하나 없는. 평생 갈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데이트를 할 때에도 장소를 중요하게 본 적이 없었다. 둘이 있으면 행복할 것 같은 곳이면 어디든 오케이였다. 그리고 그 장소는 인우의 꽃집이 되기도, 동식의 집이 되기도 했다. 

가끔 둘 다 쉬는 날엔 집에서 창 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같이 조는 날도 있었다. 서로 머리를 부딪혀서 깰 때면 마주보며 미소 짓기 바빴고, 새들마저 울지 않고 조용한 낮일 때면 검은 소파에서 저녁이 될 때까지 자기도 했다.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다. 주말에 인우의 차를 타고 가로수 공기를 만끽하며 드라이브를 즐긴 적도 있었고, 집 근처의 공원에서 시원한 공기를 맡으며 아침 산책을 한 적도 있었다. 놀이공원보다 그런 것들이 좋았다.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가장 좋았던 둘이다. 

그렇게, 그냥 그렇게 탈 없이 느리게 흘러갔으면 했다.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야속하게 빨리도 흘러간다. 그들에게 다가온 것들은 인생에서 절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사람은 사람의 시간이 있고, 꽃은 꽃의 시간이 있지만 둘은 언젠가부터 그걸 깨뜨리고 말아서인지 시간이 빨라지는 벌을 받아야 했나 보다. 원해서 깨진 게 아니었는데. 깨진 것조차 고통이었는데. 

ᅳ 2. 마음으로 품은 꽃의 이름. 

동식은 인우가 알려주었던 꽃들을 알고 좋아했지만, 첫눈에 들어왔던 꽃이 있었다. 꽃이 유별나게 예쁜 것도 아니고, 다른 꽃 보다 잘 보이는 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꽃이 자꾸만 눈에 들어와서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던 동식은 인우에게 이 꽃이 뭐냐 물었었다. 

"인우 씨." 

"네?" 

"이건 무슨 꽃이에요?" 

"이 꽃이요?" 

"네. 인우 씨가 키우는 꽃이에요?" 

"이건 제가 키우는 꽃이에요. 할미꽃." 

"할미꽃?!" 

"할미꽃." 

"내가 아는 할미꽃은 이렇게 안 생겼는데." 

"그래요?" 

"할미꽃은 고개 숙이고 있잖아요. 요렇게." 

동식은 제 등 까지 굽혀가며 인우에게 할미꽃을 묘사했다. 그리고 인우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꽤 비슷하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에 동식은 신이 나 더 열정적으로 자세히 묘사하기 시작했다. 

"동식 씨, 이제 그만. 다쳐ㅇ.." 

"이건 동식이 꽃." 

인우는 그 순간 숨이 턱 멎을 것 같았다. 카운터에 팔을 올려 꽃받침을 하고 저를 바라보며 크게 깜빡이는 눈 하며, 엉망이 된 머리, 살짝 웃고 있는 입 까지. 어쩜 이리 안 예쁜 구석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집을 틀고 눌러앉았나 보다. 

인우는 동식의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고 입을 맞춘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식이 놀란 듯 눈이 커진다. 아잇, 그렇게 갑자기..! 

 

 

 

"동식 씨도 갑자기 그랬잖아요." 

".. 그래도오.." 

"저 숨이 멎을 뻔했어요." 

"그렇게 까지요?" 

"사랑하는 사람이 앞에서 갑자기 애교를 부리는데 어떻게 안 놀라요." 

인우가 동식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이야기하자, 동식은 인우에게로 달려가 품에 꼭 안긴다. 그리고 인우도 그런 동식을 말없이 꼭 안는다. 동식은 인우의 그 말이 꼭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아 마음이 이상하게 뭉쳐왔다. 

...할미꽃 꽃말이 뭔 줄 알아요? 인우는 정적을 깨고 싶었는지, 동식에게 꽃말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알아챈 동식은 인우의 예쁜 마음이 보여 맞장구치며 대답해 준다. 

"으음, 지인짜 단순하게...행복?" 

"행복?" 

"행복." 

"그랬어도 괜찮았겠지만, 정 반대예요." 

"정말요? 정 반대?" 

"네." 

"뭔데요? 궁금해요." 

"슬픈 추억." 

"우와.” 

“어때요? "

“완전 서정적이에요.." 

"그렇죠?” 

“꽃말 듣고 꽃을 보니까...좀 달라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전 그래서 이 꽃을 제일 좋아해요." 

동식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분을 들고 창가로 향했다. 꽃의 빛깔을 잘 보기 위해서였다. 테이블에 앉아 활짝 핀 자줏빛의 꽃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슬픈 추억'이라는 꽃말을 떠올리면 꽃이 동식의 눈에 외롭고 슬프게 비쳤다. 

“..만약에요.” 

“네?” 

“슬픈 추억이 생기면 어떨 것 같아요?” 

“우리한테요?” 

“네에.” 

...인우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저와 동식은 이렇게 행복한데, 슬픈 추억?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생각보다 단순한 인우가 떠올리기엔 둘 중 하나가 죽는 것 밖엔 없는데. 그게 제일 슬픈 건 당연한 거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 

"..아니야, 상상하기 싫어요." 

"뭐예요, 그게~" 

"정말이에요, 지금 너무 행복하니까 상상도 안 돼요." 

"헤헤, 근데 사실 저도 그래요." 

동식은 어느새 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인우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그 미소를 본 인우는 동식의 머리칼을 조심히 어루만진다. 이렇게나 행복한데. 어떻게 내가 당신에게 슬픈 추억을 안겨주겠어요. 그 생각을 하니 인우의 가슴에는 울림이 일었고, 그 울림은 꽃말을 보았을 때 더 요동쳤다. 아마 떠올리는 것조차 싫어 그런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전 동식 씨한테 그런 기억 못 안겨줘요." 

"저도요." 

인우는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들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모르는 게 당연했지만, 미래를 알 수 없는 당연함은 원망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행복했는데. ‘슬픈 추억’은 그저 지나가는 말로 기억되었어야 했던 건데. 이렇게까지 당신과의 일들과, 당신의 모든 모습들을 그리워하는 일이 없었어야 했던 것이었는데. 

ᅳ 3. 꽃의 추억 

오늘도 인우는 잠자리에서 기지개를 켜자마자, 그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피어있는 화분을 유심히 바라본다. 비록 동식과 함께 했던 그 꽃은 아니지만, 이 꽃은 우리가 제일 아꼈던 꽃이니 아무렴 좋았다. 

아침이슬이 맺힌 꽃은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을 떠나보내고 나는 이렇게 지내고 있어요. 당신은 어때요? 울고 있는 건 아니죠? 하는 말을 꽃에게 전하며, 하루를 열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는 게 당연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동식과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인우는 아침마다 꽃에게 말을 걸 떼면, 동식과 했던 대화들이 생각나 자리에서 한참을 벗어나지 못했다. 표현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던 인우에게 표현하는 방법을 알아가게끔 해 주고, 낯간지러운 말들도 서슴지 않게 하게끔 해 줬던 사람. 그런 사람과 했던 대화들은 아름다웠던 말뿐이 가득이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했던 대화들이 금세 그리워진다. 

'일어났어요?' 

'으으, 네에..' 

'너무 잘 자길래 안 깨웠어요.' 

'아이, 지루하면 깨우지.' 

'안 지루했으니까 안 깨웠죠.' 

'..지루했어도 안 깨웠을 거 아니에요?' 

'맞아요, 너무 잘 아네.' 

'으휴! 이 능글쟁이.' 

"..." 

인우는 피어나는 동식 생각에 금세 기분이 울적해진다. 그래서 괜히 꽃에게 작은 미움을 드러낸다. 나쁜 놈아. 작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툭 건드니 허리를 숙인 꽃이 가차 없이 휘청인다. 그 모습은 마치 쓰러지기 전 위태했던 노인의 모습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제 앞에서 힘없이 휘청이던 동식이 생각난다. 

"...또..." 

또 동식 생각이다. 

인우는 결국 일으키려던 몸을 다시 뉘인다. 그리고 서로가 마주했던 그때처럼 옆으로 몸을 돌려 눕는다. 그러나 공허해진 옆자리는 아무것도 채워져있지 않았다. 그저 창가에서 제가 말을 걸었던 꽃 만이 눈에 들어온다. 

".. 푹 잤어요?" 

요즘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는 물음을 던진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오그라드는 혼잣말은 하지 못 했을 인우인데, 빈자리가 큰 나머지 자신조차도 이해 못 할 말이 튀어나왔다. 많이 운 듯한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손을 내밀어 옆자리를 쓰다듬는다. 그러나 느껴지는 건 차디찬 흰 침대였다. 동식 씨. 언제부터 이렇게 차가웠어요? 애써 담담하게 웃으려 속으로 농담스러운 말을 떠올리지만 오히려 독이 된 듯이 눈물이 고인다. 

인우는 멍을 때리다가 홀린 듯이 팔을 뻗는다. 그리고 무언갈 조심히 감싸듯 손을 웅크린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허공을 쓰다듬는다. 

동식 씨. 만약 당신이 내 옆에서 나를 보고 누워있었다면 아마 당신의 얼굴은 이쯤에 있었겠죠? 우리는 아마 행복했을걸요. 어쩌면 껴안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생각하니까 또 안아주고 싶다, 안아주고 싶어요. 꼭 안고 따뜻하게 있고 싶다. 따뜻하게.. 

..안고 싶었는데. 어째서 내가 안고 있는 건 그저 당신의 체향밖에 남지 않은 이불인가요? 이제 곧 이것들도 사라져 버릴 텐데 왜 내 옆에 남아있지 않아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여전히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동식 씨.. 

인우는 안식처가 없는 듯 한 기분에 몸을 웅크리고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는다. 

그리고 이내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꽃에 맺힌 이슬은 인우가 우는 걸 아는지, 물방울 소리도 내지 않고 떨어진다.

 

 

 

 

ᅳ 4. 가장 슬픈 추억 

인우는 꽃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회사를 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동식이 다녔던 그 회사를, 인우는 잊지 못했다. 출근길에 만나 데려다주었을 때 동식의 모든 모습들이 떠오르는 게 이유였다. 그럴 때마다 찌푸려지는 인상은 화가 아닌 슬픈 마음으로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인우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아직도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 입술을 작게 짓이기고 애써 눈을 돌려 가게로 향해 들어가면, 또 동식 생각 외엔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지 않는다. 

"..." 

인우는 언제나 그랬듯이 생각에 잠긴다. 창 너머로 저를 비추는 햇살을 핑계 삼아 눈을 감고, 이 자리에서 서로를 품에 안았던 날을 떠 올린다. 햇살보다 따스했던, 그 꽃말보다 더더욱 슬펐던 시간. 사랑한다는 말을 수십 번 반복하고도 성에 차지 않아 서로를 더 꽉 껴안고 울었던 날. 인우는 그 날 나누었던 말들을 조금씩 떠올려 보기 시작한다. 

'인우 씨.' 

'네?' 

'우리 행복한 거 맞을까요?' 

'...' 

'...'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난 행복한 게 좋아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저 항상 좋아해 줄 거죠...인우 씨?' 

 

'그럼요, 지금도 좋아해요.' 

 

'...' 

 

'하루에 몇 번씩 물어봐도 돼요.' 

 

'왜요?' 

 

'내가 동식 씨 질문에 대답해 줄 때 행복하다는 건 확실히 알 것 같아서요.' 

 

'내가 말해주는 건요?' 

 

'그건 더 좋죠. 더 행복하겠네요.' 

 

'사랑해요.' 

 

'저도 사랑해요.'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제일 행복했던 둘은, 품에 서로를 꽉 안으면서 계속 속삭였다. 목소리가 울먹여도, 눈물이 볼을 타고 적시며 서로를 물들여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눈물에 가라앉고 싶었다. 그 눈물이 흰 꽃잎을 천천히 붉은 자줏빛으로 물들이고 있다는 게 싫었다. 물들이는 것을 넘어서 꽃이 썩어 문드러질 수 있게 차라리 바다가 되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계속 울었다. 사랑을 속삭이는 게 행복했지만 고통스러웠던 날. 그 날은 그렇게 정의 내릴 수 있었다. 

 

이렇게 과거에 잠겨 혼자 시간을 보낼 때면, 인우는 항상 모든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냈다. 첫 만남, 고백, 데이트, 헤어짐을 준비했던 시간, 그리고 마지막 날. 항상 같은 날을 떠올려도 지겨워질 수 없는 그런 추억들. 

그저 어벙벙 하게만 보였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마음을 뚫고 들어왔지만, 동식은 오히려 먼저 고백해왔었던 기억. 그리고 그때 저의 숨을 멎게 만들 뻔 한 동식의 말을 인우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일기 한 장을 작은 글씨로 꽉 채울 만큼 행복했던 기억이었으니. 

 

식성부터 시작해 사진을 찍는 것 까지 놀랍도록 취향이 들어맞아 항상 좋아하는 곳으로 데이트를 다녔던 기억. 그래서 더 행복

했고 밤에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그런 기억. 

 

 

동식의 몸이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했던 것. 단순히 감기가 든 줄로만 알았던, 아무런 의심이 없었던 기억. 그러나 갈수록 열이 올라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엔 창백해져 쓰러지고 말았던 기억.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 전까지 그렇게 자주 휘청거렸던, 흔들리는 꽃을 보며 마치 동식 같다고 생각하며 쓰라린 마음을 달랬던 기억. 

 

그리고 마지막 기억. 

 

 

 

"동식 씨.." 

 

"..왜 울어요.." 

 

 

 

다 꺼진 목소리로 저를 달래던 모습, 힘없는 손을 들어 올려 제 눈물을 닦아주던 모습. 왜 우냐면서 정작 눈물은 자기가 더 많이 흘리던 모습. 

 

 

 

"인우 씨.." 

 

"네, 동식 씨." 

 

"저..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뭐든지 들어줄게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요, 그런 부탁이 아니에요." 

 

"그럼요?" 

 

"..인우 씨.." 

 

"네, 듣고 있어요." 

 

"사람은..죽고 나서 30초 동안 소리를 들을 수 있대요." 

 

"..." 

 

"그때까지만 눈물 꾸욱 참고..기다려 주세요." 

 

"왜요?" 

 

"인우 씨가 슬프게 우는 소리 들으면요...못 했던 말들이 생각날 것 같아요. 그런데 아무 말도 못 해주면.." 

 

'...' 

 

"인우 씨가...저한테 사랑한다고 이야기해줄 때 제일 행복하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그럼요, 당연히 기억나죠." 

 

"저도 인우 씨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때 제일 행복해요." 

 

"..." 

 

"그러니까 내가 숨을 거두면..꼭 나한테 사랑한다고 얘기해 주세요." 

 

"..." 

 

"나 괜찮아요, 울지 마요." 

 

 

 

빛이 꺼져가는 눈에서 마지막으로 비치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지는 것과, 눈이 자꾸만 감기려 드는 것.

그리고 곧 닥쳐올 죽음에 대한 생각이 동식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그러나 내가 울면 내 앞의 나의 사랑이 울 것이고, 그걸 듣는 나는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할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울 수가 없었다. 동식은 더 낯설어지고 싶지 않아 계속 참았다. 꽃이 눈물에 지나치게 젖어 고개를 숙이게 하기는 싫었다. 아무것도 건들지 않고, 다시 피고 질 때까지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두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는, 이미 지나치게 잠에 취해있는 제 모습이 느껴졌다. 온몸은 이미 녹아 흐른 듯이 힘이 없었고, 손 발이 너무나 시렸다. 이렇게 얼어버린 상태로는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눈이 저절로 감겨온다. 저항하고 싶었지만 되지 않았다. 

 

꽃들도 이랬을까, 추워져 가는 겨울에 저도 모르게 잠에 빠지기 시작했을까. 온몸으로 저항하고 싶어도 이미 얼마큼 얼어버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까. 나는 꼭 이렇게 져 버리는 한 송이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동식은 눈이 거의 감기기 전, 마지막으로 인우를 눈에 담으려 했다. 다 꺼진 보랏빛의 눈으로 인우를 보고 있노라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눈에만 담으려고 했는데, 막상 보니 말을 하고 싶었다. 내가 이제 내뱉는 말이 마지막 말이 되어도 좋으니 한 마디만 하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당신이 나를 따라오려고 할 때, 그때는 내가 못 오게 막아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 없으면 밥도 거르던 사람이 잘 먹고 잘 지낼지 걱정되는데, 이젠 걱정밖에 할 수가 없어서 미안하다고. 아니, 모든 말을 할 수 없어도 좋으니 한 번만 안아달라고 투정 부리고 싶었다. 그때처럼 서로를 안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었다. 

 

인우는 그런 동식의 눈을 보고 무언가를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얼어붙어가는 그 차가운 손을 조심히 잡는다. 눈은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져 있었는데도 인우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동식은 그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 눈을 살짝 감는다. 그 새에 조심히 다가와 저를 껴안는 몸이 따뜻했다. 잠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우 씨.." 

 

"저 한 번만 봐줘요 동식 씨." 

"..." 

 

"나한테 제일 하고 싶은 말 있어요?" 

 

"..." 

 

 

 

제일 하고 싶은 말. 동식은 결국 그 말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참으려고 했는데 자꾸만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울컥거린다. 사랑한다는 말이 온 몸속에서 피 돌듯이 돌았다. 이 말을 하지 못 하면 하늘에서 당신을 바라볼 때마다 슬퍼질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랑해요.” 

 

“..." 

 

"좋아해요.." 

 

"동식 씨, " 

 

"우리...다시 만나면.." 

 

"네.." 

 

"절대로, 절대로 떨어지지 말아요.." 

 

"그럼요. 그땐 저 동식 씨 못 보내요." 

 

"..." 

 

"동식 씨." 

 

"네.." 

 

"저랑 함께였던 시간은 어땠어요?" 

 

"..." 

 

"당신 대답이 마지막 말이어도 좋아요. 그러니까 이야기해 줘요." 

 

"..저는.." 

 

"네." 

 

"저는..지금도 행, 복..해요." 

 

"숨 천천히 쉬어요 동식 씨." 

 

"저는.. 언, 제나 행복했어요.." 

 

"그래요, 고마워요. 저도 항상 행복했어요." 

 

 

 

동식은 가빠오는 숨을 막지 못한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지만 예쁜 입술에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나

오지 못한다. 이젠 숨소리마저 꺼져가는 게 느껴져서, 인우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졸려요, 동식 씨?” 

 

“..네..” 

 

“우리 잘 까요?" 

 

".. 자면..안 되는데.." 

 

"괜찮아요. 자도 돼요." 

 

"..." 

 

"편할 거예요." 

 

 

 

이젠 인우의 말이 흐릿해진다. 숨이 멎고 있음에도 답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천천히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 인우의 말 대로 전에 느껴 본 적 없는 편안함이었다. 조금씩 다시 들려오는 인우의 목소리가 동식을 더더욱 편안하게 만든다. 

 

인우는 동식의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야만 했다. 더는 뛰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고 있는 기계의 소리를 들으면서, 얼굴에 조심히 손등을 갖다 대면 차가운 기운뿐이 돌지 않았다. 지금의 동식은 제 눈에 파란 꽃 하나가 져 버린 것처럼 비쳐서, 인우는 오열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동식 씨..” 

 

‘..네.’ 

 

“듣고 있어요?” 

 

‘네, 듣고 있어요.’ 

 

“약속은 꼭 지키고 싶어요.” 

 

‘...’ 

 

“사랑해요.” 

 

‘저도요, 저도 사랑해요.’ 

 

“행복했다고 말해 줘서 고마워요. 저도 행복했어요..” 

 

‘정말 행복했어요.’ 

“우리 꼭 다시 만나요, 그때는 지금보다 더 사랑해줄게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그렇게 끊임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며 동식은 천천히 잠에 잠식되었다. 앞으로 동식을 더 기다리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머잖아 다시 만나게 될 터이니. 그렇게 마음먹기로 했다.

ᅳ 5. 안녕, 그리고 안녕. 꽃을 전해주러 왔어요. 

"아, 허리야." 

한쪽에 가득 쌓인 짐. 여러 색의 꽃들을 돋보이게 했던 흰 벽지들은 이제 주인공이 되었다. 온통 희어진 내부를 보며 인우는 마음이 깨끗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편안했다. 동식을 잃고 처음으로 행복한 웃음을 보인 날이 오늘이었다. 차곡차곡 정리되어있는 물건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을 하면 편했다. 

 

동식을 잃은 이상 인우는 사실 두려울 게 없었다. 그렇지만 그동안 동식을 위해서라도 지내왔던 시간들. 어떻게라도 견뎌야 했지만 인우는 더 이상 그럴 자신이 없었다. 사실 지금은 행복한 게 아니라 모든 걸 놓아버린 걸지도 모른다. 생각이 모두 사라지고 비워진 걸지도 모른다. 

 

 

 

“...”

 

 

집의 물건들은 이미 다 정리가 된 상태였다. 나를 찾을 이가 없으니 이젠 아무 상관도 없을 터였다. 인우는 어떤 흔적조차 남기지 않기로 했다. 남길 이유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만 바라보면서 떠나는 그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얼른 보고 싶다.” 

 

 

 

인우는 동식이 쓴 편지를 보면서 말한다. 귀여운 글씨체로 쓰여 있는 슬픈 말들은 인우를 더더욱 울렸다. 사랑한다는 말이든, 행복했다는 말이든. 

 

 

[언제든 나를 보러 와줘도 좋지만, 그건 나중에 해도 괜찮아요. 지금은 당신의 삶을 살아요.] 

 

 

미안해요 동식 씨. 저의 삶은 당신으로부터 변했어요. 당신이 지금 내게 없는 삶은 내가 전으로 돌아간 것과 같아요. 내가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그때와 같다는 이야기예요. 인우는 속으로 제 삶을 되돌아보며 생각했다. 당신의 편지에 이제 답해준 것 같아 미안하지만, 사실인걸요. 

 

인우는 이제 마지막일 이 집의 창도, 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의 빛을 받는 자줏빛의 꽃도 이제는 마지막이니 실컷 느껴보기로 한다. 이제 한 번 잠에 빠지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테니까.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더 소중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젠 아무렴 좋았다. 

 

 

마지막으로 친동생 서지훈도 만났다. 그렇게 좋은 사이는 아니라서 자주 보던 얼굴이 아니었지만, 예의상 꼭 보고 가야 할 것 같았다. 

 

지훈은 네가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하냐며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하지만, 그걸 바라보는 인우는 그냥.이라고 대답하며 미소 짓기만 했다. 

 

지훈은 또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네가 회사를 물려받지 않고 혼자 나와 살겠다고 한 탓에, 아버지가 나를 귀찮게 한다고 말이다. 인우는 항상 듣던 이야기라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다. 그리고 말을 꺼낸다. 

 

 

 

"나 여행 가려고." 

 

"뭐? 여행?" 

 

"어, 좀 오래." 

 

"아니, 아버지 속이란 속은 다 썩여놓고 여행?" 

 

"아버지한테는 죄송하다고 전해드려." 

 

"허, 야 서인우." 

 

".. 나 갈게." 

 

"야!" 

 

"지훈아." 

 

"...!" 

 

"아프지 말고.. 잘 지내." 

 

 

 

인우는 마지막으로 지훈을 꼭 안는다. 사실 멀어지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지훈이 아버지를 가장 잘 믿고 따랐던 이상 인우는 그저 지훈에게 걸림돌이었을 테니까. 인우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이 저를 신경 쓰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만족하기로 했다. 

 

 

 

“야.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면 죽는 거라더라.” 

 

“...” 

 

“가서 죽고 나한테 시체로 오지만 마, 나 간다.” 

 

 

 

지훈은 자리를 떴다. 더 이상의 말을 듣기에는 낯간지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우는 그것까지도 이해하기로 했다. 너는 모를 테니까.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공허하기만 했던 내 인생을 채워 준 사람이었다는 걸. 그런데 그 사람이

시간이 흐를수록 넘쳐나 결국엔 무너졌다는 걸.

 

그래서 나도 더 견디기가 힘들어졌다는 걸 넌 모르겠지. 알 리가 없겠지. 

 

 

집에 돌아가는 길엔 울었다. 동식을 보내던 그때처럼 소리 없이 울었다. 동식 씨, 하루 빨리라도 당신을 보고 싶어요. 당신이 없으니까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잖아요. 나는 이래서 견딜 수가 없어요. 당신도 내 마음 알아줄 거죠? 

 

난 언제나 꽃과 마주 보며 울었어요. 꽃이 소리 없이 이슬방울을 떨어뜨리는 게 꼭 동식 씨가 우는 것 같아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그동안 용케도 버텼잖아요, 나. 내가 이만큼 밖에 못 버텼지만 당신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난 진작에 사라졌었을 거예요. 

 

내가 동식 씨 마지막 약속 이 악물면서 지켜줬던 거 기억나요? 저 그때 눈물 참느라 엄청 힘들었어요. 당신이 정말 나에게 미안해할까 눈물을 끝까지 참았는데. 그리고 당신과 약속한 시간이 지나자마자 오열했어요. 

 

찌질한 거 알지만, 나도 동식 씨에게 마지막 부탁하고 싶어요. 이기적이죠? 미안해요. 그냥 동식 씨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나 그동안 정말 힘들게 버텼으니까... 

 

수고했다고 한 마디만 해 주세요. 날 울면서 맞이해줘도 좋으니까 꼭 이야기해 줘요. 그때에는 내가 당신을 품에 꼭 안아줄게요. 서로가 부서질 때까지 꼭 안아요 우리. 

 

 

*

나무와 풀만 가득한 숲에 고립되어 버린 그에게선 꽃이 피어나고, 비가 가득하게 온 순간 흰 옷은 모두 물들어갔다. 같이 걸었던 길에서 혼자 달리고 혼자 울며 물들인 옷을 지우려고 노력했지만, 비는 자꾸만 더 내렸다. 나무 밑에서도 피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꽃이 자라면 자라는 대로, 흰 옷을 물들이다 못해 제 피부까지 스며들면 스며드는 대로. 그냥 몸과 마음이 생각하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우는 고개를 숙인 꽃의 화분을 들고 가장 높은 곳에 걸트려 앉는다. 우리가 사랑했던 이 꽃을 끝까지 품에 안고 가자고, 동식과 약속했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식과 약속을 하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 같아서 항상 보지 못 했던 그 꽃을 이제야 제대로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아 얼마나 행복한지. 

 

 

인우는 동식에게로 향하기 전 마지막 이야기를 그에게 전한다. 

 

 

동식 씨, 난 오늘 내가 원하는 모든 걸 갖는 꿈을 꿨어요. 그리고 그 모든 게 동식 씨랑 함께 할 것들 투성이라서, 그래서 울었어요. 행복해서 눈물이 났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바람이 일었을 때 나도 같이 일어나버려서, 꿈이라는 걸 알아버렸어요. 그래도 행복했어요. 꿈이 아니게 될 것 같아서요. 이제 더는 기다리지 말아요. 아니, 더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 조금 있다가 인사해요, 내가 당신에게 꽃을 전해주러 갈게요. 

 

 

 

안녕, 그리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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